“한국 사람이 세계를 흔드는 날이 반드시 온다.”
1975년, 양유찬 주미대사의 장례식 날 워싱턴포스트지의 여기자의 질문에 그가 자신 있게 던진 말이다. 비록 동방의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였지만 기개만큼은 당당했다. 이도영 회장(82). 가발업의 선구자에 세 차례의 워싱턴한인회장, 미주한인회총연합회 초대 회장, 워싱턴한인커뮤니티센터 건립위원장…. 53년 전 혈혈단신 날아온 워싱턴에서 그의 삶은 사무실에 걸어놓은 액자 글처럼 ‘사랑, 희생, 봉사’의 길이었다.
“70년대엔 공항에 매일 나가 사람들 실어 날랐죠”
정일권 대사와의 인연
강원도 홍천 생인 그는 4.19혁명이 나던 해인 1960년, 청운의 꿈을 안고 도미했다. 국학대학을 마치고 맨손으로 떠나온 고학생 신분이었다.
“조지타운대에서 외교학을 공부했는데 공부보다 먹고 사는 게 더 급했어요. 결국 공부를 다 하지 못했어요.”
그는 주미대사관 직원이 됐다. 군에서 모셨던 정일권 대사와의 오랜 인연이 계기였다.
“그분이 대사로 오시는 바람에 다시 모셨는데 이른바 최고 심복이었지요.”
63년 정 대사가 귀국해 외무장관, 총리로 승승장구하면서 그에 귀국을 권유했지만 이 회장은 워싱턴에 남았다. 아메리칸 드림을 향한 그의 열정은 60년대 한국에서의 안정이 보장된 미래를 밀어냈다.
알렉산드리아에 첫 가발점 내다
1967년,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에 가발점을 냈다. ‘Crown Wigs’란 상호였다. 가발가게는 그 후 46년간 그를 일으키고, 가족을 먹여 살리고, 보람을 찾은 가업(家業)이 됐다.
“파트타임으로 일한 미국회사에서 가발을 취급했습니다. 가방에 샘플을 가득 넣고 리치몬드 등 주로 미장원을 찾아다니며 세일즈를 했어요. 그때 가발업과 인연을 맺은 게 평생 생업이 된 거지요.”
당시 한인 가발가게는 드물었다. 하와이 출신 2세인 알링턴의 밥 최 씨가 그보다 먼저 문을 열었고 그를 이어 계은순, 남일수 씨 등이 뛰어들었다 한다. 68년에는 ‘한산 리 트레이딩 Cor’란 이름의 회사를 설립했다. 도매업도 겸했다.
“당시엔 뷰티 서플라이 가게는 없었고 가발 전문점이었습니다. 80년대 와서 요즘 한인들이 많이 하는 뷰티 서플라이 숍들이 생긴 겁니다.”
고객은 주로 젊은 백인여성들이었다. 홍콩과 일본산 가발을 처음에는 주로 팔았다. 한국산 가발을 훗날 미국에 처음 알린 것은 그처럼 한인 가발상들이었다.
“우리가 고객들에게 한국산도 좋다고 써보라고 자꾸 권했어요. 그래서 한국산 가발도 주문하게 된 거지요. 70년대 후반엔 한국산이 많아졌어요.”
비즈니스는 잘 됐다. 이 회장은 라슬린, DC의 랑팡 플라자, 코네티컷 애비뉴 등지로 가게를 확장해나갔다.
맨손으로 시작해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그의 밑천은 ‘두둑한 배짱’이었다. 한번은 뉴욕에 가게를 낼까 싶어 시장조사차 할렘가를 찾았다.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나오는 동네였다.
“남들이 다들 말리니 한번 가보자는 생각이 들어요. 밤에 골목길을 일부러 큰소리치며 돌아다녔어요. 좀 떨리긴 했지만요. 그런 배짱으로 살았어요. 그게 저를 지탱해온 이민정신이었습니다.”
73년 한인회장 당선
비즈니스가 안정되면서 그는 한인사회 봉사로 눈을 돌렸다. 73년 10월 열린 워싱턴한인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지지세력이 후원했던 고재곤 씨, 오학근 씨와의 3파전이었다.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그는 575표를 얻어 16대 회장에 당선됐다.
“아마 몇 만 불은 썼는데 다른 후보들보다 많이 써 당선된 것 같습니다. 내 러닝메이트 부회장에 반정부 측 인사인 최효남 씨를 내세웠어요. 당시만 해도 반정부 분위기가 강해 그쪽 표를 얻어야 했으니까요.”
그는 주류사회에 한인커뮤니티를 처음으로 알리며 교류관계를 맺었다. 백악관과 DC정부에 공한을 보내 한인회의 존재를 홍보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워싱턴 지역 연방 하원의원들과도 만나 한인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매일 같이 공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한국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것도 중요한 일과였다.
“그땐 연고 없는 무작정 이민자들이 대부분이었어요. 한인회에서 아예 덜레스 공항에다 안내문을 붙여놓을 정도였습니다. 도착하면 한인회로 연락하라는 내용이지요. 그러면 공항으로 달려 나가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차에 태워 한인회 근처 모텔을 구해 데려다 주었어요. 지금도 당시 일을 고마워하는 분들이 많아요.”
한인회 사무실도 없어 미국 식당이나 막 생겨난 한인 식당을 전전하며 회의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 고충을 알던 그는 76년 18대 회장에 재출마해 당선되자 DC 커네티컷 애비뉴에 첫 한인회관을 마련했다.
“현 한국 대사관에서 몇 블록 안 떨어진 곳인데 4층 건물을 매입해 한인회관으로 사용한 겁니다. 태극기가 걸려 있는 건물을 보면 가슴이 뿌듯해졌습니다.”
그는 90년에 다시 25대 회장이 돼 3선이란 기록을 남겼다. 그 직전에 회장선거 후유증으로 북버지니아와 수도권메릴랜드로 갈라진 한인회를 다시 연합시키기 위한 출마였다 한다.
“박 대통령 끝까지 인정 안해”
그의 한인회장 재임시 모국은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이었다. 한국 정부에서는 워싱턴한인회장을 여러 번 초청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부회장을 대신 보냈다.
“박 대통령이 잘한 일은 많지만 난 끝까지 인정 안했습니다. 독재를 반대한 사람들에 이유가 있는 겁니다. 한국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변함없지만 독재는 잘못 된 겁니다.”
이도영 회장은 미주한인회총연합회의 초석도 놓았다. 1977년 1월12일 워싱턴에서 미주 13개 지역 한인회장이 모여 미주총연을 결성한 것이다. 초대 회장을 맡은 그는 “각 지역 한인회는 주 정부를 상대하지만 연방정부를 상대하는 연합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이 전보로 축하전문을 보내왔다”고 회고했다.
한인회의 봉사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그의 지론은 확고하다. 그래서 한국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한인회장들에 대한 일침을 잊지 않는다.
“한인회장들은 하나도, 둘도 봉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한인회장이나 미주총연 회장이 한국을 자꾸 넘겨다보면 안 됩니다. 자존심도 없습니까.”
칠순이 되어서도 한인사회에서 그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 결성된 한인커뮤니티센터 건립추진위 이사장에 추대된 것이다. 건립운동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사퇴했지만 그는 100만 달러 희사의 뜻도 밝혀 한인사회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커뮤니티 센터는 한인사회가 힘을 합해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최대의 과제입니다. 몇몇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모두가 내 일처럼 나서야 합니다. 제가 한 100만 달러의 약속은 아직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김연아와 딸 윤정
이도영 회장은 여든 둘 고령인 요즘도 매일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 있는 ‘Crown Wigs’ 가게 내 사무실로 출근한다. 68년 결혼한 부인 그레이스 리 씨와의 금슬도 남다르다. 부부는 1녀2남을 낳았다.
얼마 전에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다시 목에 건 김연아를 보면서 감회에 젖기도 했다. 그의 딸인 윤정(미국명 릴리 리) 양도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80년대 말 이름을 떨쳤다.
미주지역 대회에서 받은 메달만 60여개가 넘으며 94년에는 노르웨이에서 열린 제17회 동계올림픽 한국대표로 참가해 모국의 명예를 걸고 은반 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윤정 양은 현재 워너브라더스에서 이그제큐티브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김연아 양을 보면서 제가 40여년 전 ‘한국 사람들이 이 세계에서 큰소리 칠 날이 온다’고 미국인들에 자신 있게 이야기하던 게 생각납니다. 우린 야코죽지 않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고 그래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반기문 유엔 총장에 김용 세계은행 총재에 우리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모두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미국 땅의 주인이 됐으면 하는 늙은이의 바람입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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