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동강 전투에 참가 김기화 예비역 해병대 대령
올해는 한국 전쟁이 휴전한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아픈 현실을 가슴에 안고 살고 있는 한민족에게 ‘전쟁’이라는 두 글자가 가진 비극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전쟁이 끝난 지 강산이 6번 넘게 변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지만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기억 속엔 그날의 동족상잔의 참상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다.
만 17세 소년의 전쟁에 대한 기억은 한강 철교가 폭파되는 굉음과 함께 시작됐다.
“6.25 발발 3일 후였죠. 새벽에 엄청난 폭발음에 놀라 깼습니다. 당시 한강변 흑석동에 살고 있었죠. 달려가 보니 철교 허리가 부러지고 참담한 모습이더군요. 수영에 자신이 있던 터라 옷을 벗고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학교가 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김기화 예비역 해병대 대령은 용산중학교 5학년(고등학교 2학년) 재학 당시의 기억을 또렷이 간직하고 있었다. 용산 대로를 건너 학교로 가는 도중 바라본 육군 본부 건물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삼각지에 이르자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골목에 숨어 인민군 대열을 지켜봤습니다. 말과 화물, 야포... 10분 정도 끊임없이 밀려 내려오더군요.” 이미 서울은 유령의 도시였다. 인민군의 군화 소리 외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한강 백사장에는 국군이 버리고 간 철모, 수통, 부러진 카빈총 등이 널부러져 있었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별의별 고생을 다하며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했다. 어느 날 치안국에서 경찰 통역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다. 영어에 자신 있는 터라 응모했다. 경찰 전투대대에 배속됐고 부마 가도를 달려 경남 창원으로 갔다. “시체 냄새가 코를 진동했습니다. 일선이구나 금방 알았죠.”
김기화 소년은 미 제2사단 23연대 I 중대에 배속됐다. 미군 통역이나 할 줄 알았던 소년이 전쟁 영웅으로 탈바꿈해가는 순간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지 이틀 후. 전진 명령이 내려졌고 도강 작전이 전개됐다. 미 공병대가 제공한 25척의 나무배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
적군이 따발총을 맹렬히 퍼부어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총알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겁니다. 선체에도 안 맞아요. 저쪽 강변에 도달해서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사방을 뒤덮은 죽음의 그림자들>
시체 때문이었다. 인민군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시체 뒤에 숨어 총을 마구 갈기고 있었다. 조준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시체는 강을 따라 왜관에서도 계속 흘러왔다. 배가 시체를 치우고 상륙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다.
새벽에 시작된 작전은 어두워져서야 적군의 참호를 탈취하며 종결됐다. 여우굴(fox hole) 하나를 찾아들어간 소년은 솔잎 위에 누워 정신없이 골아 떨어졌다. 아침해 비추자 잠에서 깬 소년은 뭔가 이상했다. 솔잎을 들추고 보니 그 아래에도 인민군 시체들이 즐비했다. 다른 참호들도 마찬가지였다. 허름한 옷에 앳된 얼굴들... 강제로 데려온 남쪽 출신의 의용군이었다. 인민군은 퇴각하면서 잔인하게 의용군들을 집단 사살한 것이 분명했다. 또래 청년들의 헛된 죽음을 보며 소년은 진저리를 쳤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서울, 개성, 평양을 거쳐 개천까지 거침없이 올라갔다. 개천은 6.25 전사에서 주목되는 ‘군우리 저지 작전’이 펼쳐진 곳. 중공군과의 일대 혈전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겨울의 길목이었던 11월 26일 군우리 앞에 도착해 진을 쳤다. 중공군의 공격은 29일 새벽 정적을 깨는 피리소리로 개시됐다.
“어떻게 설명할까요. 심금을 울린다고나 할까. 기분을 미치게 만들기도 하고 신비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가냘픈 소리인데도 잘 들렸습니다.” 싸움 없이 장개석 군대를 무너뜨렸다는 그 피리소리였다. 큰 전투 경험이 없는 김 소년은 겁이 났다. 그런데 2차대전을 치른 경험이 있는 미군들의 표정은 태연자약했다. 다소 위로가 됐다. 1시간 후 이번엔 나팔 소리, 다시 꽹과리 소리... 미군이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대낮 같이 밝아진 들판에 중공군은 총을 갈기며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포복하는 병사는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몇 번 진격해 오던 중공군은 결국 물러났다. 그러나 낮이 되자 포탄이 비오듯 쏟아지고 파편과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나님 나 살려주세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정말 무서웠다. 기도 덕분일까. 다행히 희생자는 많지 않았고 김 소년도 목숨을 건졌다.
<소년에서 용사로>
혹독한 겨울이 지났고 미군은 1.4 후퇴로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1951년 2월13일. 그 유명한 지평리 전투가 일어난 날이다. 사실 23연대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 고립돼 있었다고 봐야 옳다. 크지 않은 마을을 프랑스 군을 포함 5,300명의 유엔군 병사들이 방어하게 됐다. 1.6 킬로미터의 마을 주변을 철망으로 둘렀다.
그날 저녁 야음을 틈타 조용히 접근한 중공군은 난데없이 자동소총을 쏘며 공격해왔다. 김 소년은 최전방에 배치돼 있었다. 아비규환의 전투가 벌어졌다. 부상당한 미군 연대장도 나와 병사들을 독려했다. 사흘간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몇 개의 탄창을 갈았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게 소년은 커갔다. 영어에 자신 있어 통역병으로 응모했던 소년은,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무서워 기도했던 소년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습니다. 용케 살아났네요.”
그야말로 용케다. 가평 전투에서 박격포에 맞아 쓰러진 후 깨어난 곳은 부산. 미군 이동병원(MASH)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진작 죽었을 거라는 군의관의 설명을 들었다. 그 때의 파편은 아직도 팔꿈치에 들어있다. 2개월 간의 입원 치료를 끝내고 김 소년은 다시 해병대에 입대했다. 3개월 훈련 후 임관해 해병 제1전투단 합류.
김 대령은 “내가 제법 박력이 있었던 것 같다”고 그날을 회고했다. 1951년 9월 김일성 고지 공격(3일간 혈투), 낙동강 창원 전투, 사천강 전투 등 한국전의 획을 긋는 모든 전투에 김기화 대령이 있었다.
그는 해병대 최초의 전차 중대장(1953년)이라는 명예도 얻었고 진급할 때마다 최연소의 기록을 세웠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구차한 것을 싫어하는 김 대령은 그러나 1972년 갑자기 예편하게 된다. 설명하자면 길지만 상관에게 직언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상이 용사지만 한번도 특별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60년이 지나 전쟁 한국전쟁의 의미가 어떤가 묻자 그는 “소중한 조국은 어떤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1984년 이민 와 메릴랜드 락빌에서 카페테리아를 운영하며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던 김 대령은 자신이 젊음을 불태워 지켰던 조국이 발전한 모습이 자랑스럽다. 미국에 와서도 영어를 잘해 먹고 사는 게 지장이 없었다는 그는 지금까지 별로 훈장을 꺼내 자랑하지 않았다. “그게 다 부질없다”는 김 대령은 “아메리칸 드림까지는 아니어도 적당한 드림(moderate dream)은 이룬 것 같다”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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