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의 메카 워싱턴
6월 민주항쟁은 일회성 무브먼트가 아니었다. 유신과 전두환 군사정권 이래 기나긴 민주화 대장정의 종결판이었다. 군부독재 아래서 조국의 언론에 재갈이 물려 있을 때, 두려움에 진실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미국의 동포들은 1969년 3선 개헌 반대운동 시위를 시작으로 과감히 저항의 깃발을 흔들었다. 반 유신운동에 이어 80년에는 광주에서의 신군부의 만행을 고발하고 전두환을 타도하자는 운동이 타올랐다. 한동안 소강기로 접어들었던 미국내 반정부 운동은 85년 2·12 총선 이후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세력이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면서 다시 점화됐다. 이 직선제 개헌운동의 중심은 친 김대중 인사들이 주축이 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연합(약칭 민통)’이었다. 김영삼 계로 분류되는 ‘민족문제연구소’ 와 ‘한국민주회의’의 고세곤, 김석남 등도 열정을 바쳤다. 민주화운동의 중심지는 워싱턴이었다. 미국의 정치·행정 수도라는 점, 한국 대사관이 소재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워싱턴은 자연스레 미주 민주화운동의 메카로 부상했다. 김대중의 망명도 빼놓을 수 없다. 김대중은 1982년 크리스마스이브 하루 전인 12월23일 망명객 신분으로 내셔널 공항에 내린 후 85년 2월6일 귀국할 때까지 2년3개월 가까이 워싱턴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김대중은 70년대 설립된 민통과 함께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워싱턴에서 창설, 운영했다. 이 두 조직은 80년대 미주사회에서 모국의 민주화를 위한 기지나 마찬가지였다. 망명 후인 1983년 발족, 미 전역에 지부를 개설한 인권연은 김대중의 가장 든든한 정치 후원조직이었다. 국무부 앞 데모와 직선제 개헌운동
1986년 2월, 신민당과 민추협이 1천만 개헌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미국에서도 민주단체들을 중심으로 이 운동의 대열에 합류했다. 가장 먼저 2월18일, 민통 워싱턴위원회(위원장 박문규)는 1천만 직선제 개헌 청원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매일 상오 11시30분 국무부 앞에서 정부의 개헌 서명 저지에 항의하고 김대중의 가택 연금 해제를 요구하며 1시간동안 데모를 벌였다. 여기에는 박문규, 서유웅, 김응태, 고세곤, 심기섭, 이근팔, 조창구 등 동포들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에 체류하던 이신범, 정동채 등 반정부 인사들도 참가했다. 육사 15기 출신으로 워싱턴에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온 고세곤 씨의 증언이다.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을 1년간 전개했다. LA,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도 서명운동을 한 것으로 안다. 워싱턴에서는 모두 300-500명의 서명을 받아 서울 민추협으로 보냈다. 당시 민추협에서는 김명윤, 김덕룡과 연락이 닿았다. 동포들의 관심은 높았다. 그러나 원래 보수적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은데다 오랜 폭압 정권을 경험해 신분에 대한 불이익을 우려해서인지 서명을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86년 범동포 민주화 워싱턴위원회 결성
1986년 6월27일 워싱턴에서 ‘조국 민주화촉구 워싱턴위원회’가 발족됐다. 제5공화국의 인권상황에 대한 우려가 국제사회에 점증하던 당시 한식당 우래옥에서 발족한 이 단체에는 166명이 참가했다. 공동 대표위원에는 고응표, 이도영, 조한용 전 워싱턴한인회장, 자문위원은 역시 전직 한인회장인 박원규, 서준택, 서독대사를 지낸 전규홍, 6군단장 재임시 5.16 군사 정변에 반대했다 체포됐던 김웅수 미 카톨릭대 교수가 위촉됐다. 위원회는 결성 선언문과 강령을 채택했다. 또 전두환과 레이건 미 대통령에게 한국의 민주화를 촉구하고 협조를 구하는 서한을 보내며 모국의 민주화를 위한 대열에 합류했다. 이 위원회의 결성은 6월 항쟁 바로 1년 전에 미국의 심장부에서 탄생한 대중 단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동안 미국에서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소수의 열성적 민주 투사들과 친 김대중, 김영삼 동포들이 주도해왔다. 또 반정부 운동에 대한 주미 한국 대사관과 국가안전기획부 측의 압력과 방해 공작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여건 하에서 한인회장들을 비롯한 광범위한 동포들이 결집했다는 것은 그만큼 전두환 정권에 대한 범 동포적 반감이 팽배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들은 전두환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개헌으로 정쟁이나 또 하나의 새로운 불합리를 호도하려는 정치적 기만만이 꾀해진다면 지난날의 아픔은 결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며 하늘의 진노와 국민의 분노는 가시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년 후 그 분노의 경고는 역사적 현실로 나타났다. 백악관 5월 행진
6월 항쟁의 불을 당긴 것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그해 2월 이 극악무도한 사건이 미국에 알려지면서 워싱턴 동포들의 민심도 들끓기 시작했다. 얼마 뒤 이른바 ‘4.13 호헌조치’가 발표됐다. 헌법 개정 논의를 일체 금지시킨 것이었다. 조국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증폭됐다. 4.13 조치에 대한 반작용은 시국선언과 미 언론 기고 등을 통해 터져 나왔다. 재미 한인교수 39명은 시국선언문을 작성하고 서명을 했다. 뜨거운 5월이 왔다. 한국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발대식이 열리던 무렵, 미 동부의 민주단체들은 재미 한인들의 민주화를 위한 뜻을 만천하에 알리자는 취지에서 백악관 시위를 계획했다. 총 궐기일은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로 잡혔다. 장소는 백악관 바로 앞의 라파엣 공원. 타이틀은 ‘27년 군사독재 종식을 위한 5월 민주화 대행진’이었다. 워싱턴의 고세곤, 박문규 등에 뉴욕의 박성모, 안중식 목사, 민통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서경석이가 앞장섰다. 필라델피아의 김경재, 이홍만(훗날 국회의원 역임)도 나섰다. 동부 민주단체들이 하나로 힘을 합쳐 대규모 대중 시위를 조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국이 민주화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중대한 시점입니다. 미국의 독재정권 지원 중단을 촉구하기 위한 민주화 대행진을 벌임으로써 재미 한인들의 피플 파워를 보여줍시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조국애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도 만사를 제치고 가족과 함께 워싱턴으로 갑시다.” 이들은 동포신문에 광고를 내고 팸플릿을 제작해 집회를 알렸다. 이날 공원에는 약 400여명이 참가했다. 당시 반정부 시위에 1백 명이 넘게 참가한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들은 백악관에서 주미 한국 대사관까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고 3시간가량 열기를 뿜어냈다. 문동석 워싱턴 총영사에 성명서를 전달했다. 종교계도 총동원 궐기대회
6월이었다. 이한열의 죽음이 알려졌다. 모국의 민주화 투쟁의 열기는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동포신문과 미 언론을 통해 속속 한인들에 속속 전해졌다. 워싱턴에서도 5월에 이어 두번째 백악관 앞 집회를 준비했다. D-데이는 한국에서 민주화 시위가 막바지에 다다른 6월28일이었다. 행사명은 ‘조국을 위한 대기도 및 궐기대회’. 여기에는 민통, 인권연, 조국민주화촉구 워싱턴위원회 등 민주단체는 물론 개신교 목사, 천주교 신부들도 가담했다. 워싱턴 민주화 시위 사상 최대 인원인 1천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백악관 앞에서 기도를 올린 다음 1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국무부까지 도보 시위를 하면서 한인들의 의사를 알렸다. 참가자들은 민주화를 촉구하는 각종 구호가 적힌 판을 손에 들거나 목에 걸고 ‘직선 쟁취’ 등의 구호를 외쳤다. 징과 꽹과리도 동원돼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위는 4시간 동안이나 진행된 후 종료됐다. 워싱턴에서 6월28일 실시된 이 집회가 민주화 촉구를 위한 마지막 시위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시차로 인해 28일 오후부터는 한국에서는 29일이었다. 이른바 6.29 선언이 있던 날, 백악관과 국무부 앞에서 최후의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당시 워싱턴위원회에 몸담았던 인사들의 증언이다. “시위후 본부 요원 10여명이 고응표 공동의장 자택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며 담소하고 있을 때 한국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이 전해왔다. 다음 날에야 정확히 확인됐지만 그 소식은 6.29 선언이었다.” 16년 만에 우리 국민은 직선제를 쟁취했다. 6월 민주항쟁은 빵과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란 명언을 입증한 쾌거였다. “그 날, 거리를 가득 메웠던 순수한 열정과 정신이야말로 소중하고 값진 민주주의의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기념사처럼 워싱턴과 재미동포들도 6월의 역사에 동참하며 모국의 민주주의에 값진 기록을 남겼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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