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에 간 건 우연이었다. 모처럼의 고국 방문길에 난생 처음 해남 땅끝마을과 강진을 둘러오기로 했다. 오래 전,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흥준교수가 이곳부터 출발하라고 일러주었던 곳이었다. 그는 이곳을 “영랑의 슬픔과 다산의 아픔”이 스민 남도의 일번지라고 했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으면서 평생 그리워한 곳이었다.
나는 해남땅 월출산에서 늦봄을 맞기로 했다. 2박3일 일정을 잡고 지도를 펼치니 길목에 담양이 눈에 들어왔다. 태학사의 지대표께 여정을 알리자 바로 문자가 왔다.
“담양은 꼭 들르세요. 그곳과 남도 일번지는 저도 철마다 가는 곳입니다. 유능한 해설사들을 소개해드릴테니 안내를 받으세요.” 지자체가 도입된 후 지방마다 유산들을 복원하고 그 고장 문화와 역사를 전문적으로 안내하는 해설사 제도가 탄탄히 뿌리를 내린 것 같았다.
서울에서 새로 난 서해안고속도로를 탔다. 충청도를 지나 전라도로 드는 산천은 경상도쪽보다 순하고 고즈넉해 보였다. 곳곳에 산허리를 뚫고 최신공법으로 지은 긴 터널을 연이어 지나다가도, 어느 틈엔가 지평선이 펼쳐진 푸른 평원을 나룻배로 물건너 듯 유유히 흘러갔다. 모처럼 입가에 육자배기가 흥겹다.
담양은 광주의 동북쪽 무등산 기슭에 닿아있었다. 옛 부터 많은 정자와 누각들이 있음을 들어온 터였다. 담양10정자 중에서도 조선시대 유명한 원림건축의 백미 <소쇄원>과 송강 정철이 가사 성산별곡을 노래한 <식영정>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대나무숲 <죽녹원>에서 댓바람소리를 들으면 하루 해가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도착하자 해설사는 우리를 “메타세코이야” 가로수길부터 안내했다. 영화에서 본 젊은 연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길이었다. 외국에서 왔다고 서구적인 풍치부터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몰랐다.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나 킹스케년의 세코이야보다는 훨씬 작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곧게 뻗은 나무둥치들과 무성한 이파리들은 숲의 터널을 이루며 잘 가꾸어져 있었다.
그러나 영화세트같은 인공적인 운치였다. 나는 문득 메타세코이야 가로수밑 개천에 아무렇게나 핀 맥문동 들풀에 눈길이 갔다. 물가 음지에 자라며 사람들에게 진액을 보해준다는 약초. 유서깊은 담양도 떼로 몰리는 관광객들의 취향 따라 인공조림한 외래종 가로수들을 더 선호하는 게 아닌가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맥문동 풀꽃에서 눈을 떼지못하는 우리들을 보고 해설사는 가장 담양다운 곳으로 안내하겠다고 했다. 그곳이 슬로시티였다. "느리게 사는 마을"이란 뜻인데 이젠 세계 여러 곳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했다. 분초를 다투며 살아가는 산업도시속 생활형태로 부터 자연친화적인 삶을 찾아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운동의 일환인 셈이다.
삼지내 마을로 접어들자 옛 전통한옥들이 올망졸망 앉아있다. 돌담길을 끼고 맑은 시내가 졸졸 흐르는데 집집마다 문패들이 달려있다. "아궁이가 예쁜 집", "분꽃이 웃는 집", "누렁소랑 누렁흙이랑" 싯구같은 이름들이 마음에 와 안긴다. 우리는 목을 빼고 집안을 기웃거리다가 정원이 예쁜 민박찻집에 들어갔다.
40갓 넘은 듯한 부부가 다기에 불을 붙여 황차를 끓여준다. 녹차보다 맛이 순하다. 방의 앞뒤 미닫이를 다 여니 서늘한 바람이 뺨에 닿고, 툇마루 지나 붉고 흰 작약꽃들이 화폭에 가득 담긴 듯하다. 그들은 어린 자식들을 흙만지며 키우고 싶어 낙향했다고 했다. 참 어른스런 사람들이다.
나는 미국 땅에서 40년을 촌음을 아끼며 쫓기듯 살아왔다. 무얼 위해 이리도 허둥대었을까? 문득 흐드러진 작약꽃더미 위로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는 구름의 그림자가 보인다. 나도 꽃 한뿌리 얻어다가 정원에 심고 싶다. 그리고 "작약위로 구름이 흐르는 집"이란 문패를 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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