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선 <수필가>
널따란 신작로 내리막길을 냅다 달리다 보면 동네 어귀에 가장 크고 높은 방앗간 건물이 둔탁한 미닫이문을 열어 놓은 채 하품을 하고 있다. 가을걷이가 때 이른 여름 오후 방앗간은 동네 어르신들의 놀이마당 역할을 톡톡히 해 낸다. 텃밭 농사이야기 부터 엊그제 타지에 살고 있는 장남가족 다녀갔다고 으쓱대며 죽장을 휘 젓는 할아버지도 계시고 서울에 사는 며느리가 보내온 꽃무늬 화려한 몸빼를 걸쳐 입고 자랑 좀 하려다 판사 손주사위 보게 되었다고 자신이 판사라도 된 양 괜한 으름장을 놓는 양철 대문 집 마나님 때문에 꽃무늬 몸빼 할머니는 슬그머니 입가만 훔친다.
동네 유일한 버스정류장이 되기도 하고 오가며 짐 보따리 잠시 맡겨 두는 보관소가 될 때도 있고 온갖 동네소식 퍼 나르는 지역 방송국 역할도 해낸다. 그 방앗간을 꺾어서 돌아서면 혼자서 걸어도 갈지자를 그리게 되는 좁다란 논길을 꼬불꼬불 따라가다 고추밭 지나 감자밭 고랑 넘어 파란 하늘보다 더 커 보이는 대문이 반갑게 맞아 주는 나의 외갓집이 있다.
내가 어릴 적 기억하는 외갓집은 암행어사가 호통 치는 대궐처럼 굉장히 큰 집터였다. 이맘때 대청마루에 올라서면 온 동네가 그림같이 펼쳐져 마치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리듬을 타듯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양탄자처럼 싸리 빗질이 잘 정돈된 마당에는 지나가는 나그네도 외면하지 않는 풍성하고 넉넉한 인심이 주렁주렁한 과일 나무들이 담장 넘어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그 과일 나무들 중에 앵두나무를 내가 제일 좋아했었다.
가느다란 가지마다 휘어지도록 알알이 채워진 연붉고 해맑은 빛깔의 앵두! 조막만한 손바닥에 담아내기엔 너무 벅차게 탐스러웠던 앵두나무는 유연의 순수했던 꿈처럼 아직도 가슴 한편에 아름드리 새겨져있다. 몇 주 전 구독하고 있는 신문에 향우회 모임 공고가 실렸다. 멀리 바다 건너와 낯선 땅에서 갖가지 사연을 품고 살아가고 있지만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지금도 내 부모와 형제가 지키고 있는 고향 사람들이 한자리에 만나서 옛정을 나누며 서로 친목과 우의를 다지고 고향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힘을 모으자는 아름다운 뜻이 있기에 엄마를 모시고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화창한 날씨가 모임에 나서는 발걸음을 가볍게 재촉한다.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공원에는 벌써 많은 고향 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맛있는 점심식사를 즐기고 계셨다. 그 곳에 앞서 도착한 여동생 식구들 말고는 알아보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지만 오랜 친구처럼 다가와 반기는 옛 동무(?)의 정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가까운 뉴욕과 커네티컷 또 멀리 플로리다와 노스 캐롤라이나 에서까지 고향 ‘향우회’란 이름 하나로 한 걸음에 달려오신 이유를 굳이 말로 표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어제도 만났던 소꿉친구들처럼 구수한 고향 말투의 정겨운 이야기들은 향우회 모임을 알리는 펄럭이는 현수막을 넘어 어느새 고향집 앞마당에 멍석까지 깔고 있었다.
지금은 고향에서 지역 정치인으로 존경받는 외삼촌의 선후배도 오고 바다건너 이역만리에서도 친구 일이라면 한숨에 날아가는 외삼촌의 절친도 그 자리를 빛내 주고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현수막을 배경으로 소중한 기념사진도 남겼다. 또 하나의 새로운 추억이 새겨지는 공원에서 한나절은 오랜 세월 기다렸다 다시 맛보는 청량제 같은 달콤한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리움을 불러내는 설렘이 있고 언제라도 다가가 기대고 싶은 푸근함이 서려있다. 오늘 하루도 추억 속에 흠뻑 젖어 버린 나는 또 주인 바뀐 외갓집 파란 대문 앞을 서성이고, 그들 또한 고향 길 어딘가에 정을 흘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태연하게 일상을 지켜 가겠지. 나이 들고 노년에 고향을 떠나 무료한 타향살이 정붙일 동무 없는 엄마의 굽은 등을 바라보다 문득 또 다른 고향생각에 잠시 눈을 감는다. 청명한 하늘에 흰 구름은 유유히도 흐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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