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름이 다 지나갔다. 구월의 끄트머리에서 요즘 내 일과 중 하나는 날짜를 세는 일이다. 시월이면 난 해방이다. 일로부터의 탈출이다. 어릴적 방학하는 날, ‘와아! 방학이다! ` 하며 우루루 교문을 뛰쳐나오던 그 심정이랄까.
오월부터 구월까지 오개월, 그중에 3개월은 하루도 쉼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더위와 싸워가며, 작디 작은 공간에서, 아플 새도 없이, 밥 한끼니 먹을 시간도 없이, 미친듯이 보내는 반면 주 고객인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가고 없는 나머지 2개월은 하염없이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며 무료함을 견디느라 읽은 책 또 읽기, 신문이며 잡지며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기, 수도쿠 easy부터 evil까지 풀어 치우고, 먹어 치우고, 터질듯한 배를 쥐고 제자리 달리기에, 좀이 쑤셔 비비 꼬이는 근육들을 달래느라 샌드위치 냉장고와 싱크대를 이용한 스트레칭에, 미친 사람처럼 좁은 공간을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이 모든 표현들이 이 일터에서의 매일을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지만 하여간 그렇게 바쁘든 한가하든 미친 듯했던 150여일이 끝나가고 있다.
이 열악한 공간에서 벌써 14년째, 나의 40대와 50대의 대부분, 그 여름들을 보낸 것이다. 결코 풍족한 수입도 아니건만 그 긴 세월을 한 자리에서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일년 중 나머지 200여일 때문이다. 그 200여일의 날들을 보내기 위해 150여일의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이다. 굳이 나보다 더한 악조건에서 일년 내내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들먹이지 않아도 나는 행복한 투정을 부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여간 나는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그 대부분의 시간들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로 소진하는데 이 여행길은 어디를 향하여 간다기보단 나를 만나러 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 돌아다니는 일들을 차라리 방랑이라 부른다.
보다 더 많은 시간들을 홀로 자연과 대면하고 대지의 맨살을 느끼고 그 대기를 호흡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이는 일이다.
그뿐인가! 그 길들 위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자연에 대한 기억들은 일상을 치유하는 힘을 지녔는데, 나의 일상을 불안과 나태, 불만, 걱정, 미움, 질투 같은 부정적인 마음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지겹게 반복되는 시간들에 지칠 때면 저 벌판 가장자리를 따라 흔들리는 포플러 나무들의 물결이 나를 가고싶은 시간들로 이끌고, 스물스물 다가오는 불안과 걱정은 모뉴먼트 밸리의 거대한 암석 기둥들의 크게 보라 하는 숭고한 목소리에 그 붉은 대지 저편으로 사라지고만다. 누군가 인격도 실력도 없는 거들먹거림에 시달리는 어두운 마음은 강가 넓은 자갈밭의 햇빛과 수없는 은비늘을 빛내며 흐르는 강물이 내 안에 퍼지면 평화로 잔잔해진다.
자연과 내가 같이하는 시간은 신이 머무는 시간이다. 내 안의 신성과 조우하는 시간이다.
인간이 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사랑하는 것.
사람은 사랑을 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만난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란 지나친 자기애의 발로이기도 하고 이기심과 소유욕의 군더더기를 항상 수반하기에 그 길은 멀다. 자연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것을 가능케하는 유일한 대상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을 나눈다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할 때 언제나 거기 있어주고 내가 관심을 주거나 말거나 늘 내게 베풀고 말해주고 보여주고 일러주고 끊임없이 다독인다. 다만 내가 무심하거나 귀와 눈을 닫고 있어 그 사랑을 알아채지 못할 뿐.
이제 곧 여름을 벗어나 가을과 긴 겨울 그리고 봄에 나는 자연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 사랑에 미치고 취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년 여름이 오면 비록 내 작은 주머니는 텅 비어있겠지만 그러나 환하게 빛나는 얼굴로 일터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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