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불후의 명곡”의 팝페라 가수, 임태경이 북가주에 왔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엘리트의 면모와 부드러우면서도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뮤지칼 무대를 휩쓸고 있는 그의 노래를 나도 좋아한다.
그 중에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는 팔순 어머니를 위시한 우리 가족의 애창곡이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 보다 높은 저 하늘..” 으로 시작하는 첫 소절만 들어도 쪽빛 창공이 마음에 가득 차는 듯하다. 그가 데뷰시절 옛 약혼자와 함께 불렀던 이 발라드는 외국 번안곡라는데 그 정감과 가사가 어느 연가보다 마음에 와 닿는다.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없어 바램은 죄가 될때니까..”
생각하면 대학시절 아내를 만난 이후, 미국에 정착, 두 아들을 키우며 소박한 바램으로 살아온 셈이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은 아니었어도 원하는 직장에서 평생 수질환경관리 전문업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다. 그러면서 여느 가정들처럼 크고 작은 굴곡의 터널을 지날 때마다 언젠가는 푸른 하늘아래 꿈같은 행복한 날이 올 것이라고 다둑이며 살았다.
그러나 부끄럽지만 이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고해(苦海)같은 인생에 눈부신 날보다 비 바람 부는 날이 더 잦은 걸 애써 외면하고 살아온 것을. 폭풍우 속 거세게 뿌리는 빗줄기 속에서도 행복한 노래를 들을 수 있어야 삶이 덜 서럽다는 것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하늘이 푸르던 10월 초 어느 날, LA에 계신 연로하신 어머니가 낙상하셨다는 급보를 받았다. 고관절뼈가 네 조각이 나서 수술을 받으신 것이다. 잦은 기침으로 찍은 엑스레이에 한쪽 폐가 하얗게 나와 일년 내내 독한 폐병약을 드시며 괴로와하신 게 불과 작년이었다. 쇠약해진 몸으로 생사의 고비를 여러번 넘기시고 이제야 겨우 입맛이 돌아온다고 좋아하셨는데 뜻밖에 사고를 당하신 것이다.
“아침에 모처럼 하늘빛이 곱고 바람이 신선해 서둘러 창문을 열다가 미끄러졌다. 허나 이만하기 다행이다. 뼈가 산산조각 나지 않아 붙일수 있었고, 넘어질 때 머리 안다친 게 감사하다. 이번에 대학원 졸업한 두 손녀들 시집 보내고 가는 게 내 소원이다. 하나님께 연명을 기도드렸다.” 병원으로 달려간 우리 부부에게 어머니는 오히려 의욕에 찬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어머니의 사랑스런 두 손녀는 작년 여름, 오십 초반에 세상 떠난 내 남동생 건이의 딸들이다. 오랫동안 지병을 앓으면서도 큰 딸, 르네의 기숙사가 있는 샌디에고 길을 틈만나면 함께 오가며 앞날을 상의하고 아비의 정을 쏟았었다. 이제 르네는 법대를 졸업하고 아비와 의논한대로 의료전문 로펌에 들어갔다. 둘째 앤도 아빠가 근 1년간 암투병하던 당시 휴학까지 하고 아빠를 도왔는데 졸업후 간호사가 되었다.
아침에 들린 병석에서 어머닌 내 손을 잡고 말하셨다. “참척의 슬픔을 당한 이 에미가 무슨 할 말이 있겠니. 다만 두 손녀들을 오래 지켜주고 싶다. 그렇게 고대하던 두 딸의 졸업도 못보고 떠난 제 아비 몫을 남은 식구들이 맡아줘야 하지 않겠니.”
6.25때 홀홀단신 남하하셔서 평생 외롭게 사신 어머니는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가족인 걸” 하고 노래 끝소절을 고쳐 부르고 계신 것이다.
동생 건이가 잠들어있는 로즈힐 언덕에 올라갔다. 불과 일년 밖에 안지났는데 동생 묘지옆에 새 친구 무덤들이 제법 많이 생겼다. 모두 무슨 사연들을 안고 하늘로 갔을까? 제수씨와 동생의 두 딸들이 얼마전 추모예배때 꽂고 간듯한 바람개비가 하늘하늘 돌아가고 있다.
묘지 풀섶 위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이 가득한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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