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에서는 도도한 소리를 치며/ 비류강이 흐르고 있다/ 그 수면에 아른아른한 자색층이 어린다 / … 중략 … / 불행이여/ 지금 강변의 황혼 그림자/ 땅에 끌리는 긴 불행이여/ 쓸쓸히 젊은 여인의 창에/ 커튼이 닫히듯 나는 눈을 감는다 / 보잘 것 없이 낙혼한 사람/ 이젠 어둡구나/ 십이봉 사이로/ 하마 별이 하나 둘 떠오르지 않을까/ 나는 그것을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차라리 초원의 어느 일점을 응시한다/ 문을 닫은 것처럼/ 캄캄한 색을 띠운 채/ 비류강은 무섭게 도사려 앉은 것 같고/ 내 육신도 오후/ 주체할 도리가 없다.
<이상 ‘한 개의 밤’ 중에서>
절망의 베일을 벗기면 지복의 상태라는 뉴 에이지 철학의 영향일까, 아니면 삶의 지혜가 생겨서일까, 가능한 한 누구에게든 절망감을 얘기하지 않기로 마음먹곤 한다. 나의 경우는 사람을 좋아해서 누군가와 얘기하면 우선 기쁘기에 좋은 얘기가 흥분되어 쏟아진다.
친구들과의 오랜 관계에서 형성된 역할이 있어 똑같은 얘기를 수십번 들었는데도 또 다시 친구의 괴로움을 들어주기도 한다. 괴로움을 말하는 친구는 해결해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기를 원해서 나에게 전화하는 것이고, 오랜 친구라 괴로운 얘기를 해도 판단하거나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믿고 얘기한다.
죽음에 이를 듯한 괴로움, 해결할 수 없이 삶에 내재하는 존재의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함께 얘기할 수 있는 벗은 소중하다. 삶에는 기쁨도 있지만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고, 한 잔 마시며 서로 다 알고 있는 괴로움을 얘기하고 또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하지만, 이런 친구가 늘 곁에 있지는 않기에 때로는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달랜다. 시를 읽을 때마다 놀라곤 한다. 시인들은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 기쁨과 슬픔, 그리움, 통한과 희망이 모두 시 속에 있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 시인의 마음과 함께 하며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위로받는다.
이 삶이 좋은 삶이고, 감사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아는 데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감에 시달릴 때에 조용히 다시 한번 읽는 시가 이상<사진>의 ‘한 개의 밤’이라는 시이다.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에 쓴 듯 병고와 절망감이 극에 달한 듯한데, 이 시를 읽고 나면 마음이 절망적으로 된다기보다는 지극히 맑게 자신의 고통을 기록하고 있는 시인을 따라 마음이 고요해지고 섬세해진다. 마치 그의 방에서 눈을 감고 꼼짝없이 앓고 있는 시인이 깰세라 조심스레 그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별조차 바라볼 기력 없이 홀로 앓고 있는 시인을 향한 형언할 수 없는 측은지심이 인다.
그 깊은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 눈을 감으며 ‘쓸쓸히 젊은 여인의 창에 커튼이 닫히듯 눈을 감는다’는 시어의 아름다움을 탄생시킨 시인의 천재적 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깊고 어둡고 찬란한 색채의 그림을 보듯 시의 곳곳에 색채의 감각이 숨 쉰다.
샛노랗고 빨간 나뭇잎들이 흩어진 거리를 걸으며 아마도 즐거운 성탄의 절기 어디엔가 쓸쓸하고 괴로운 마음들이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뇌를 안고 싸늘한 날씨에 추위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죽음에 가까운 병을 앓으며 쓴 시가 내게 위로가 되듯이 누군가 이 시의 고요하고 맑은 아름다움으로 위로를 받으면 좋으련만… ‘보잘 것 없이 낙혼한 사람’… 허탈한 이 싯귀는 어쩐지 내게 위로가 되어주곤 하여 가끔 입술에 올리며 혼자 웃곤 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