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그리운 고향을 노래하며 외로운 타향살이 60여년에 청춘만 늙어 백발 노인이 된 지 오래다.
해외 동포 방북이 허용되어 나는 1차 방북 단원으로 꿈에 그리던 고향을 방문했다.
나는 비행기 속에서 민족의 숙원인 남북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굳은 각오로 김 일성을 설득할 묘책을 창안하여 김일성 면담을 신청했다. 김 주석은 함경도 온천에서 요양중이라고 했다.
나는 가는 곳마다 고위층의 분에 넘치는 환영을 받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북한 어린이들이 불러주는 고향의 봄은 감개무량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안기부 요원들의 안내로 워커힐 안가로 초대되었다. 방 안에는 안기부장이 보낸 화분과 탐스러운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나는 혁명을 시도하다 중정에 연행되기도 했고 계엄령 포고령(사형) 위반으로 감옥 살이를 되풀이한 위험 인물로 감시 대상이었다.
안기부 부장, 통일원 장관, 적십자사 총재등 정부 요인들의 파격적인 대접을 받고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특히 은사인 김상협 고대 총장이 적십자사 총재가 되어 간부들을 대동하고 환영 만찬을 베풀어 줄 때는 남달랐던 사제간의 옛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정부 행사 뒤에는 고향 친구 노인들이 밀려와 나도 가게 해 달라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나는 이산 가족 무제한 상봉을 실현하겠다는 결심으로 다음 해 다시 방북하여 남북 회담 북한 대표를 만나 이산 가족의 서신 교환과 무제한 상봉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장시간 설득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북한 대표는 나의 주장대로 남한 대표단에게 제안했으나 남한 대표단은 납북 어부와 납북 KAL기 승무원을 보내라는 조건을 달아 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놀라운 사실을 임동원 전국정원장(당시 통일원 차관)이 상세히 설명해 주는데서 알게 되었다.
1994년초 평양 발행 통일신보에 이인모(항일 투쟁 당시 김 일성 연락병)를 보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는 김일성 주석의 간절한 소망이 보도되었다.
나는 무릎을 치고 다음 날 서울로 가 이인모와 이산 가족 상봉을 맞바꾸자고 YS에게 건의하여 3월 7일 이인모 장기 복역수는 전격적으로 송북되었으나 YS 정부의 외교적 실수로 1,000만 이산 가족의 한 맺힌 숙원이 무산된 것은 IMF 못지 않은 실정이었다.
실향민 서신 교환과 무제한 상봉은 김일성 주석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북한 정부는 김 주석의 유언을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가 성공하려면 이산 가족 상봉이 선행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산 가족 서신 교환과 무제한 상봉은 남북 긴장 완화와 통일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하나마나한 100명 쇼만 되풀이 하지말고 내가 제안한 무제한 상봉을 한다면 남북 모두에게 대박이 터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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