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에 나무들은 미친 듯 발작을 일으키고 그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외로움의 세포가 스믈스믈 번져나간다. 그 세포가 온 몸에 전이되면 어디로든 또다시 떠나고 싶어진다.
여행의 후유증이다. 특히 여럿이 다녀온 여행의 뒤에 찾아오는 목마름이다.
Albinoni의 adagio를 한껏 크게 틀어놓고 그 소리에 푹 파묻혀 얼굴들, 웃음들을 그리워한다.
한국에서 온 언니와 친구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한 콜로라도로의 여행은 일주일이 넘는 먼 길이었다. 네바다, 아리조나, 그리고 뉴멕시코를 통과하여 콜로라도 로키산에 이르는 여정 동안 운전기사를 자청한 남편을 포함해 정말 오랜만에 끊임없는 수다와 웃음이 범벅이 된 즐거운 여행이었다. 계속되는 강행군에 모두들 지쳐있었지만 마음은 한껏 들떠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하였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모여 함께한 시간들이.
눈을 감고 우리를 여정 내내 이끌었던 풍광을 다시 그려본다.
아리조나 세도나, 붉은 바위 위에 기어올라 모두들 나란히 가부좌한다. 온 사방에 붉은 바위 산들은 거대한 기둥처럼 웅장하게 솟구쳐 있고 발 아래엔 아름다운 세도나의 집들과 길들이 펼쳐져 있다. 구름은 푸른 창공을 직선으로 내달리고 온갖 잡다한 소리들은 바위산들을 휘돌아 감으며 부는 바람에 묻혀 고적하다. 이 대지의 기운을 온 몸으로 들이마시고 내 안의 더럽혀진 찌꺼기들을 남김없이 뱉어낸다.
Sunset Crater 검은 땅을 지나 가도가도 끝없는 Painted Desert 붉은 기운의 대지, 그리고 그 위로 드넓은 하늘엔 하얀 구름들이 바람에 쓸려 솜처럼 날린다. 단지 하늘과 땅만 있는 곳, 오직 바람만이 그 안에 머물렀다 가는 곳, 여기에선 우리들은 모두 수천 수 만년을 이 대지와 하늘 사이를 오고 가는 바람으로 떠돌아 다니는 한 점 먼지가 된다.
멀리 거대한 붉은 바위벽들로 병풍을 두른듯하던 길은 뉴멕시코 산타페를 거쳐 콜로라도에 다가가면서 만이천 피트가 넘는 수 없는 봉우리들이 솟아있는 산맥을 거느리고 간다. 하얀 눈을 백발처럼 흩날리며 짙푸른 망토를 걸치고 우리들을 깊고 그윽한 눈으로 내려다본다.
Sand Dunes, 수천 년 불어온 바람에 실려 신기루처럼 펼쳐진 모래언덕이 우리 앞에 나타나자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입을 다문다. 무슨 말이 이 광경을 표현할 수 있으랴. 다만 햇빛이 사라지기 전 절박하게 셔터를 눌러댄다. 한 컷이라도 여기 왔었노라, 눈에 보이는 증거를 남기고 싶은 것이다.
콜로라도는 눈 천지로 우리들을 맞는다. 온 세계가 은회색 꽃으로 뒤덮여 어느 동화책, 눈의 나라에 온 듯 환상적이다. 로키산은 거기 전설처럼 우뚝 솟아 있다. 눈앞에 솟구쳐있는 산 봉우리들은 웅장하고 장엄하다 못해 숭고하다. 그 위로 성스러운 바람이 불고 순백의 눈발을 안개처럼 뿜어낸다. 그 신성한 입김으로 우리들이 지나는 길 양 옆 숲과 빈들, 언덕 꼭대기 바위, 호수에 이르기까지 하얀 눈을 내려 눈이 부시다. 아득히 저 아래 둥지를 틀고 있는 Estes Park을 향해 눈 쌓인 길을 구불거리며 기어간다.
아쉽게도 로키산은 너무 꽁꽁 얼어붙어 우리가 그 품에 파고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락에 들어 며칠 언저리를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로키산의 숨결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다.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기 위해 덴버 비행장으로 향할 때 그 길고도 긴 로키산맥의 행렬은 25번 프리웨이를 달리는 내내 나란히 같이 가면서 우릴 배웅해준다.
아듀! 로키산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고 장엄하다! 우리의 이 미미한 짧은 생 동안 너를 다시 못 볼지라도 너는 우리를 기억하리라. 우리가 한낱 먼지로 이 세상에 와 너를 만났었다는 것을, 그리고 너를 가슴에 새기고 떠났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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