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고얀 놈 봤나! 알고 보니 네가 일본의 첩자가 아니더냐? 어디 내 손에 죽어봐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 이강이 분노하여 ‘천의 목소리’로 알려진 연예인 황재경에게 권총을 겨루었다. 황은 노래 한 곡 하라는 이강의 청을 받고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치어, 젊은 날 …’ 하며 한참 뽑고 있던 참이었다. 이강의 생일잔치에 모였던 하객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숨을 죽이고 권총을 뽑아든 왕자와 노래하다 말고 죽을상이 되어버린 청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왕자님, 제가 왕자님 손에 죽는다면 더없는 영광입니다만 왕자님께서 왜 절 죽이려 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이유도 없이 죽이시면 왕자님께서 오해를 받으시게 될까 두렵습니다.” 잽싸게 무릎 꿇고 엎드린 황재경이 아뢰었다.
“네가 정녕 시치미를 뗄 참인가?” “해명이 없으시니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어찌 알겠나이까?”
이를 통해 황재경의 사람됨을 알게 된 이강은 당시 연희전문 학생이었던 황재경을 불러 둘은 종종 만났다. 물론 ‘켄터키’에 얽힌 사연도 알려 주었다. 이강이 미국 버지니아주 로녹 대학 유학 시절(1901-1904) 한 여자를 사귀었는데 그녀가 스티븐 포스터의 ‘켄터키 옛집…’ 을 좋아해 둘이 같이 그 노래를 부르곤 했다는 것이다. 20대 청년이었던 왕자에게 그런 애절(?)한 사연이 있었나 보다.
“아무리 나라가 망했어도 이 대한제국의 황손 아닌가? 어려서 정실부인을 두었고 첩실도 여럿인데 외국 여자와 결혼이 될 노릇인가? 포기할 수밖에.” 그의 설명이다. “그런데 한번은 반도호텔에서 연락이 온 거야. 내 약혼자라는 여자가 미국서 와서 ‘프린스 캥’ (캥은 강의 미국식 발음) 을 찾는다는 거였어. 곧 짐작했지. 배 타고 먼 길 왔는데 어쩌겠나? 가서 만났어. 미안하고 안 되긴 했지만 내 처지를 설명했네. 난 이미 부인이 있고 첩도 자식도 여럿이라고. 정실부인으로 결혼할 수는 없는 몸이라고 말이야. 눈물 흘리고 있는 애인을 호텔에 두고 돌아섰지. 나로서는 처음으로 사랑이란 걸 했던 여자였는데…. 우리에게 결혼이라는 것이 어디 사랑해서 하는 것이던가? 집안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거지. 그래도 내겐 특별한 여자였어. 외로운 유학시절에 만나 끔찍이 좋아했거든.”
위 이야기는 젊었던 시절 만담가로, 천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 성악가, 또 갖가지 고전 악기와 톱 연주자로 이름 날렸던 황재경, 6.25전쟁 중에는 ‘미국의 소리 방송’ 아나운서였던 황재경 목사님이 버지니아의 우리 집에 오셔서 했던 이야기다. 목사님은 이강이 머리 좋고 똑똑했지만 순종 다음으로 왕위에 오를 순위인지라 여러 사람, 특히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술과 여자에 빠진척하며 살아야 했다, 따라서 당시 학생이던 자신을 불러 울분을 달래느라 노래, 만담, 악기연주를 부탁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럴 듯 싶었다. 또 ‘프린스 캥’을 찾았다는 여인도 이해되었다.
아마 19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쯤이었으리라. 기억은 흐릿한데 신문에서 한국의 왕자와 약혼했던 약혼녀의 이야기가 특집기사로 난 것을 보았다. 아마 그 여자가 그때쯤 죽었던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와 조금 다르긴 해도 같은 두 사람 이야기인 것만큼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강 외에 코리아의 어느 왕자가 로녹 대학을 다녔겠는가? 어머나, 싶어 그 기사를 오려 놓았는데 다른 세상만사처럼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묘연하다.
얼마 전 TV에서 우연히 이강의 아들 이석의 특집방송을 봤다. 한국에 남은 왕자 이강의 유일한 아들이란다.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와 나이트클럽서 주로 외국 팝송을 부르다 73세인 지금은 전주 한옥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도 노래를 즐겨 부르곤 했다니 왠지 뭉클하다.
110여년 전 로녹 대학에서 푸른 눈의 애인과 켄터키 옛집을 불렀던 청년.... 한 여성을 사랑했던 젊은이…. 우리의 마지막 왕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