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무 관저리 하도 시언차나서’ 우아한 표정으로 품격있게 승강기를 탄다. 문이 꼭 한뼘만큼 남기고 거의 다 닫히는데 에고, 에고, 잠깐만 기다려요. 나좀 태워 주.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나를 잡는다. 서둘러 열림 단추를 찾는데 이게 닫히는 건지 저게 열리는 건지 눈도, 손가락도 허둥거린다.
간신히 한분을 합승 시키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또 다른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세우고 태우고 세우고 태우고 그렇게 몇 차례를 하곤 드디어 출발. 슬그머니 짜증이 솟다가 생각하니 내가 목숨부지를 위한 절체절명의 직장 인터뷰를 가는 것도 아닌데 일분이 지체되면 어떻고 십분인들 무슨 상관있으랴 싶다.
그 길고 긴 세월, 죽을 힘을 다해 눈꼽만큼 키워온, ‘느림의 철학’ 이라는 깊고 푸르른 경륜을 단 일초 상관에 물거품을 만들뻔 했던 내 맘의 얉음을 얼른 붙잡아 제 자리에 앉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득 나를 멈추게 한게 할머니들을 바라본다. 만약 나를 약 오초 지체하게 한 이유가 재잘거리는 내 손주 또래의 애들이었더라면 짜증은 커녕 이게 웬 삶의 축복이랴 하고 입이 찢어졌을 텐데. 아니 오초가 아니라 제발 오분이기를 간절히 기도할텐데. 나도 할머니면서 할머니들을 보면 답답한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할머니들은 일단 느리다. 또 할머니들은 일단 목소리가 크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수줍음이라든가 양보가 적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뭐든 우선 요구해 보고 본다. 안되면 말고 하는 식으로.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자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대부분의) 이런 대부분 때문에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 잉여인간보듯 시큰등하게 본다.
일생을 통해 애들 기르고 집안 꾸려가며 온갖 설움 다 참아낸 후 문득 둘러보니 기껏 도달한 장소가 세상 모든 이들이 잉여인간 보듯시큰둥해 하는 할머니 자리라니. 나를 포함한 할머니들이 측은하고 애처롭다. 화려한 금메달 시상식 자리는 아닐지라도 그저 무심히 넘겨 봐 줄 정도의 보상은 주어졌으면 좋으련만. 나도 예전엔 할머니는 날때부터 할머니로 태어나는 줄 알았다.
새싹처럼 파릇파릇한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게 남들은 날때부터 늙은 모습으로 태어나 긴 긴 세월을 그 모습을 유지하며 살아온 줄 알다니. 나는 마치 할머니가 된 육체속에서 시간이라는 장지문을 조금열어놓고 가만히 밖을 내다보는어린 소녀 같다. 그 무시무시한 세월의 횡포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은 내가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뿐. 그렇게 생각하며 할머니 한분 한분을 바라보니 슬슬 재미있어지기 시작한다.
불러 세운게 미안해 슬금슬쩍 눈치를 살피며 새삼스럽게 아주 친한 사이인척 집 안팍의 안부를 묻는 이. 그러저러한 것 아무 상관없이 고뭇줄 놀이하다가 불려온 아이처럼 신명나는 얼굴로 깔깔대며 하던 수다 마저 떠는 할머니. 뒤에서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가만히 있는 할머니. 고급 옷과 핸드백을 방패처럼 두르고 표정없이 묵묵하게 서있는 할머니. 젊었을 때는 타고난 미모가 미추를 가르지만 나이가 들면 자신이 살아온 세월의 내공이 얼굴에 드러나는 것 같다. 젊은 이들의 눈에 보이는 나의 모습은 어떤걸까 상상해 본다.
나이들면 미모, 재물, 학식 등 모든 게 평준화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러나 그 모든 게 평준화 된다 하더라도 각 개인들이 갖고 있는 표정, 마음가짐, 통찰력, 표용력 등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평준화 될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자신에게 꼭 중요한 단 한가지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알때 그 한 가지와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주어진다는 삶의 역설을 깨닫고 생활속에서 활용되어진다면, 세월의 무자비한 횡포속에서도 끝끝내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여린 들꽃처럼 값진 보물이겠다. 노인의 필살기는 너그러움과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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