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이 전환 시기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채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을 재연기하기로 합의했다. 한국군이 북한의 위협에 대응할 만한 독자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판단에 따른 결정이겠지만, 전작권 전환은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2015년 전작권 전환을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고 약속한 대표적 안보 공약이었던 만큼 이를 파기한 데 대한 비난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한미 양국은 2012년 4월 전작권을 전환하기로 합의했지만 2010년 천안함 사건 직후 한국군의 독자적 방위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드러나 전환 시점을 2015년 12월로 한 차례 늦춘 바 있다. 국방부는 예정된 전작권 전환 재연기 이유로 북한의 지속적인 핵·미사일 위협을 들고 있지만, 북핵에 대해서는 이미 미국의 핵우산 보장을 받고 있는 터라 설득력이 없다. 북핵은 핑계일 뿐 문제는 전작권 환수에 대한 군 수뇌부의 의지다.
지난해 11월 5일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이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벌이면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으냐”고 묻자 국방부 정보본부장이 “한미동맹에 기초해서 싸우면 우리가 월등히 이기지만 미군을 제외하고 남북한이 1대1로 붙으면 우리가 진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야당 의원들은 “북한의 34배나 되는 국방비를 쓰면서도 지느냐”고 힐난했다.
올해 한국 국방 예산은 약 34조5,000억 원이다. 북한의 국방비는 한국의 3%에 불과하다. 그토록 엄청난 국방비를 쓰면서도 “남북한이 1대1로 싸우면 우리가 진다”고 말하는 군 수뇌부의 한심한 태도를 보면 전작권 전환을 무기한 연기하려는 진짜 속내가 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현리 전투’를 기억하는가. 1951년 5월16일~22일 동안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서 중공군과 맞선 한국군 3군단이 방어에 실패하고 패주했다. 당시 군단장이던 유재흥 장군이 3사단장을 대리로 지정한 후 경비행기를 타고 제일 먼저 전장을 이탈하자 전 병사들이 전의를 잃고 뿔뿔이 도주했다. 이 전투에서 3군단 예하 병력의 60%인 19,000여명이 희생됐다. 한국전 사상 최악의 패전을 기록한 현리 전투를 계기로 당시 밴플리트 유엔군 사령관은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을 해체하고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미군에 넘겼다. 1군단 또한 미군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해, 사실상 이 때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미군 없이는 북한에 진다”고 한 국방부 정보본부장의 말은 필경 6.25 때 입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으로 무능한 군 수뇌부의 자학적 인식을 가감 없이 대변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한국군의 전작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데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 유재흥은 전역 후 국방장관을 거쳐 전직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회장이 된다. 군단 해체와 지휘권 박탈 명령을 내린 밴플리트 사령관으로부터 “다른 일자리나 알아보시라”는 등의 치욕적인 말을 들었던 그가 후일 성우회 회원들을 이끌고 전작권 환수 반대의 선봉에 선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50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군에 전작권을 넘긴 지 64년이 흘렀고, 노태우 대통령이 1987년 전작권 환수를 공약한 지도 어언 27년이나 됐다. 한국은 군비지출 세계 12위이자 무기수입 세계 2위의 군사 강국이다. 이제 그만 자주국가의 표상인 군사주권(전작권)을 되찾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자력으로 나라를 지키려 하는 대신 스스로 주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외세에 의존하려는 자존감 없는 군대라면 하등 존재할 이유가 없다.
“한국군 장성들은 미군이 나가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생각하더라. (전작권 환수를 결사반대하는)한국군 장성들이 한심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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