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애틀에서 향년 103세로 사망한 일본계 노파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크게 보도됐다. ‘구구팔팔이삼사’의 요즘 세태에 뉴스가 될 만한 장수는 아니다. 신문에 실린 그녀의 사진이 낯익었다. 쪼그랑 할머니가 아닌 새댁이다. 원래 그 사진의 타이틀은 ‘표징 배경의 그 여인(The Woman Behind The Symbol)’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그 때 그 여인’이다.
사진 속의 후미꼬 하야시다 여인은 멋쟁이다. 결혼식에라도 참석하러 가는 듯 코트와 모자로 한껏 치장했다. 잠든 아기를 안았고 손엔 핸드백과 딸의 강아지 봉제인형을 들었다. 입을 꼭 다문 굳은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도, 돌이 갓 지난 딸아기도, 옷깃에 길다란 신분증명 꼬리표를 매달았다. 항공여행 가방에 매다는 짐표와 영락없이 닮았다.
이 사진이 찍힌 1942년 3월 30일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의 페리부두에는 당시 31세로 임신 중이었던 후미코와 남편 및 두 자녀를 포함한 일본계 주민 227명이 총검을 든 군인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페리 편으로 시애틀로 건너온 후미꼬는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캘리포니아의 오웬스 밸리 사막으로 호송돼 미처 완공되지 않은 만자나 수용소 가건물에 갇혔다.
미국정부는 일본의 진주만 폭격 2개월 후 전국의 일본 이민자 12만여명을 오지의 10개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켰다. 적국(일본)의 간첩이 될 것이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베인브리지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후미꼬는 일본군의 조국(미국) 침공에 분개했지만 자신의 얼굴이 바로 그 적군과 같다는 이유로 미국의 적으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이 서글펐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만자나에 입소한 지 5개월 후 둘째 아들을 낳았다. 좁은 방에서 많은 사람이 복작댔다. 특히 칸막이 없는 ‘변소’가 가장 불편했다고 토로했다. 이용자가 뜸한 늦은 밤까지 기다리기 일쑤였고 급할 땐 카드보드 상자를 둘러치고 용변을 봤단다. 후미꼬 가족은 1년 후 아이다호의 미니도카 수용소로 자원 이주했다. 고향 시애틀에 가깝게 가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80세가 넘은 뒤 살아있는 역사인물로 떴다. 스미소니언박물관이 1993년 일본 여인 관련 전시회를 준비하며 입수한 자료 중에 시애틀 P-I지의 1942년 게재사진이 있었다. 아기를 안은 여인의 신분증 꼬리표를 확대해 후미꼬 하야시다라는 이름을 알아냈다. 수소문 끝에 시애틀에 사는 그녀가 수용소 출신 일본계 시민 중 최장수 생존자임을 확인했다.
그 후 이 사진은 강제수용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표징 사진이 됐다. 남편과 사별 후 비콘힐에서 쓸쓸히 살던 후미코 할머니도 바빠졌다. 수많은 전시회와 강연회에서 연설했고 연방의회에 출석해 수용소 생활의 참상을 낱낱이 간증했다. 100세 때인 2011년엔 베인브리지 부두의 사진이 찍힌 현장에 건립된 ‘일본계시민 배척 기념관’ 개소식에도 초청 받았다.
전국의 일본계 시민을 일시에 철조망에 가둔 장본인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다. 역대 유일의 4선 ‘위인 대통령’이지만 의회의 동의 없이 독단적 행정명령으로 무고한 시민들의 인권을 짓밟은 ‘폭군’이다. 역대 대통령의 이민자 관련 행정명령은 지난주 오바마 대통령 것까지 39차례나 있었지만 루즈벨트의 ‘9066호’ 행정명령은 역사의 수치로 지탄 받는다.
베인브리지 기념관의 슬로건은 ‘니도토 나이 요니’다. ‘비극의 재발을 막자’는 뜻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누가 알랴? 벼랑 끝에 선 김정은이 홧김에 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본토인 워싱턴 주로 미사일을 날리고, 미국이 이를 응징하면서 15만 한인주민을 가장 먼 플로리다로 강제 이주시킨다고 가상해보라. 만화 같은 망상이지만 70년 전 상황도 그랬다.
후미꼬 할머니에게 배울 교훈이 있다. 당시 수용된 일본인들은 정부명령이 부당하더라도 순응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인 줄로 믿었다고 했다. 단 한 사람도 적국 일본의 첩자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군에 입대해 일본과 싸웠단다. ‘미국은 한민족의 철천지 원쑤’라는 북한의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한인이 적지 않은 우리네 현실과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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