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매리는 어머니가 항상 계 회원들에게 고마워했고, 한 번도 곗돈을 밀린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은행 융자를 받을 수 없었던 시절에 계는 한인들의 유일한 융자수단이었고, 많은 여성들이 하숙집을 운영했고, 또 조그만 아파트 건물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2세 중에 많은 이들이 어머니에게서 2층의 아파트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여성들만이 계를 이용한 것이 아니고, 남자들도 계를 했다. 1958년에 한인 성공회 성누가교회를 건축할 때 남성 교인들이 계를 해서 건축기금을 헌납하였다. 일본인과 중국인도 유사한 제도를 이용하였는데, 일본어로는 ‘타노모시’, 중국어로는 ‘후이’라고 불렀다. 1941년에 남편 기븐이 주는 생활비와 그동안 저축한 1만2,000달러로 비숍재단(Bishop Estat)으로부터 코코헤드(Koko Head)에 침실 3개의 집이 딸린 2 에이커의 땅을 임대받아 카네이션 농장(사진 아래)을 시작하였다. 기븐이 생활비는 주었지만 애들린의 코 수술 비용도 필요했고,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막내딸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비용을 위해서는 자신의 수입이 필요했다. 마침 결혼한 매리와 사위, 그리고 아들 데이비드의 도움으로 땅을 일구고, 한인 2명을 고용하여 카네이션 꽃을 기르고 새벽에 차이나타운 레이 상점에 갔다가 팔았다. 데이비드와 길찬록, 그리고 고용인들도 농장 집에서 살았는데 천연희가 세끼를 준비했다. 카네이션 농장을 21년 동안 운영하다가 헨리 카이저(Henry Kaiser) 가 하와이 카이를 개발하게 되면서 농장 계약기간도 끝이 나게 되었다. 시내로 들어와서 살 수 있었지만 남편 기븐이 코코 헤드 지역을 좋아해서, 개간되고 있는 곳에 새로 땅을 임대받아 아직 전기불도 없는 집에서 살게 되었다. 1964년 여름에 남편이 폐에 문제가 있어 육군병원(Tripler Army Medical Center)에 입원하였다. 마당에 풀도 심고 나무도 심으면서 남편의 퇴원을 기다렸는데 기븐은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이 때 5남매는 다 결혼하여 따로 살고 있었다. 결혼한 자식 집에 얹혀 살 천연희가 아니었기에 그 집에 혼자 살았다. 경제적으로 자식들 책임질 일이 전혀 없었지만, 일 밖에 모르고 살아온 천연희가 가만히 놀고 있지 않았다. 1969년까지 그 집에 혼자 살면서 밭을 일구고 한인 1명을 고용하여 채소를 길러 한인 마켓에 공급하였다. 1970년에 시내의 노인 아파트로 이사하였고, 1988년에 한인양노원에 입주하여 살다가 1997년 9월 21일에 102년의 삶을 마쳤다. 자녀들의 교육을 중시했던 천연희의 바램대로 자녀들은 모두가 교육을 잘 받았고, 직장생활도 순조롭게 잘 하였다. 특히 딸 매리와 루스는 학교 선생님으로 정년 퇴직까지 하였다. 자녀들의 교육과 직장은 아래와 같다.
순애: 맥킨리고등학교 졸업 후 사망데이비드: 맥킨리고등학교 졸업, 대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 길찬록과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독학으로 우체국 시험에 통과하여 우체국 배달부서의 부장까지 지내고 은퇴하였다. 은퇴 후 부동산 중개사로 활동하였다. 매리: 하와이대학교 졸업, 초등학교 교사로 은퇴해리: 루즈벨트고등학교 졸업, 상선(商船)에서 일한 후에 유나이티드 항공회사의 고객관리부서에서 일했다.
애들리안 :맥킨리고등학교 졸업, 코 수술을 위해 본토로 갔다가 곧 그 곳에서 결혼하고 정주하였다. 루스: 하와이대학교 졸업, 초등학교 교사로 은퇴 막내 딸이 하와이로 가서 장수하기만을 빌었던 친정어머니의 소원대로 천연희는 102년의 천수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생전에 자녀 5명 (큰 딸은 일찍 사망)에게서 손자/손녀 10명과, 증손자/증손녀 16명을 보는 기쁨도 누렸다. 1915년 진주를 떠나온 후에는 친정어머니를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천연희가 마우이에 살고 있을 때 진주에서 온 사진신부가 친정어머니 소식을 전해 주었다. 진주에서 천연희의 친정어머니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워하며, 어려운 형편에 있던 천연희를 많이 도와주었다. 천연희가 어머니, 언니와 편지 연락은 한 것 같은데, 진주에서 온 편지는 남아있지 않다. 1930년경에 친정어머니 집에 불이 나서 다 타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고, 마침 곗돈을 타 놓은 것이 있어서 보내드렸다고 딸 매리가 기억하고 있다. 매리는 외할머니 사진을 본 적이 없고, 1930년 경 쯤에는 외할머니 집이 그리 넉넉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매리는 외할머니가 1936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천연희가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언제 알았는지, 그의 기록에서는 알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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