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마치 초여름인냥 화창하다. 따끈한 햇살에 물장란하던 여름의 기억이 나는지 손자는 물놀이 하게 물 받아 달라고 졸졸 따라다니며 조른다.
아무리 날은 좋아도 물놀이 할만큼은 안된다고 여름까지 기다리라니까 몇 밤 자면 여름이 오냐고, 세 밤만 자면 되는냐, 열흘로는 안되냐, 마치 할머니만 납득시키면 그 당장이라도 여름이 도래하기라도 하는듯 끈질기게 조른다.
적어도 100 밤은 자야 한다니까 백이라는 숫자가 너무도 아득히 까마득한 듯 망연한 기색이다. 어릴 때 세월이 너무나 천천히 가는듯 하던 기억이 난다. 그 세월이 지금은 너무 빨리 간다.
새해가 벌써 한달이 지났다. 아차 하는 순간에 곧 12월이 닥칠 터이다. 내게 주어진 세월은 얼마나 남았을까 가늠해 본다. 그러면서 간직했던 물건들을 들춰본다. 예전에 끄적여 놨던 노트를 꺼내 읽어가며 버릴건 버리고 아직 더 간직할 것들은 따로 추려 놓는다.
십 년, 이십 년전의 글줄을 돌아보려니 어떤 것은 마치 남의 이야기인듯 생경하기까지 하다. 이름을 봐도 도무지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 이도 있고 어떤 사건, 상황은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새삼스럽기도 하다.
그러가 하면 아주 오래 전의 글인데도 지금의 생각과 별다름없어 어제 오늘의 느낌인듯한 글도 있다.
한 사람 안에도 여러 부분이 있어 어느 부분은 일찍 성숙하고 어느 부분은 성장을 거부하며 오랜 세월 한 자리에서 서성이는듯 하다.
기뻐서 머무르고팠던 순간도 있고 너무도 아파 도저히 잊을 수 없어 오래 부둥켜 안고 있던 상처도 있었다. 지나고 보면 모두 부질없고 덧없는 것이라 할수 있겠지만 결국 그 덧없고 부질없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내가 형성된 것일게다. 사람마다 제각각 이승에 와서 건진 소중한 것들이 다 다르겠지만 내게 삶이란 사람을 말하는 것 같다.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만난 사람, 학연이라는 인연으로 성장기를 나눈 사람, 생판 남인 사람이 남편이란 이름으로 함께 해 이승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기까지의 그 길고 험난했던 여정. 자식으로 다가와 상전되어 내게 호령하고 요구하는 아이들.
직접 져야하는 책임이 없기에 오히려 극진히 오직 사랑으로만 주고 받아 달콤할수 있는 손자녀석. 그리고 말이 통하고 감성이 통하고 재능을 높히 사 존중할수 있는 글동무, 그림동무, 길동무. 깊히 가면 갈수록 철저히 혼자의 길임을 무섭게 깨닫게 하는 신비로운 신앙의 길에 바람처럼 햇살처럼, 기도중에 함께 해 주는 교우. 그 모든 사람과의 인연이 이 세상을 살다 건져가는, 달콤 쌉쌀한 여행의 추억을 압축한 소중한 기념품 같다.
지난 해, 많이 힘겨운 해였는데도 그 갈피마다 참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수 있어서 행복했다. 젊어서는 가치도 없는 허울때문에 사람의 참진가를 놓치는 경우가 흔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겉치장이 필요없어져 홀가분하다. 이제는 돈도 필요없고 학벌도 필요없으며 출세도 권력도 필요치 않다.
꾸미지 않아도 되고 허풍치지 않아도 되며 내숭떨지 않아도 된다. 언젠가 티브이 대담프로에 나온,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 노라노 할머니가 옷이 그 옷을 입은 사람보다 더 눈을 끌면 그건 안좋은 옷이라는 말을 하는 걸 듣고 나는 담박에 그 분께 반해 버렸다.
새로운 패션을 탄생 시키는 것이 일생의 업이었던 분이 그런 말을 할수 있다니! 삶의 진수를 한 큐에 보여주는 멘트! 그토록 성숙한 안목을 간직하며 늙을 수 있다는 건 비록 우리네 남루한 인생일지라도 한번쯤은 살아볼만한 게 이승의 삶이라는 걸 증명해 주는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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