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까지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대전에서 학업을 마치시는 동안 난 온양을 헤집고 다니는 중이었다. 어렸을 적이지만 뚜렷한 기억들이 참 많다. 그때 살았던 집의 구조, 내가 숨고 장난치며 지내던 구석들, 밖에서 뛰어놀던 곳...
주로 여름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난다. 집 안이 더워지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안방에 있는 장롱이었다. 이불이 수북히 쌓여 있는게 더울 것 같지만, 사실 햇빛이 쬐지 않아서 제일 시원했다.
키가 크지 않은 아이가 들어가 박혀 있기에 제일 적합한 사이즈였고, 푹신한 이불 위에서 잠들기도 했다. 차가운 장롱 속을 뒹굴다 보면 이불 하나 하나씩 밖으로 삐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산 위에서부터 굴러 내려온다는 상상을 하면서 이불울 돌돌 말며 장롱에서 내려왔다. 할머니는 치우느라 애를 쓰셨을 것 같다.
이른 오후쯤 밖으로 나가면 강아지풀부터 구했다. 날개가 길쭉한 잠자리는 무섭고, 팔짝 뛰는 메뚜기는 더더욱 무서웠지만 강아지풀은 그나마 안전한 장난감이었다.
어떤 날은 강아지풀로 부케를 만들어서 얼굴에 비비곤 했고, 어떤 날은 제일 큰 강아지풀을 찾는 목표로 내 주위에 수없는 강아지풀을 흘리고 다녔다. 가끔씩 소꿉동무가 있던 날엔 강아지털은 반찬으로 우리의 돌멩이 식사상에 놓여졌다. 작은 조각으로 찢어논 풀조각은 보리밥, 세로로 잘라놓은 풀은 나물, 보송보송한 진수성찬이었다.
놀이터라곤 근처에 찾아볼 수 없었지만, 집 옆에 풀밭과 잘 포장되지 않았던 길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해가 지기 시작해야 이웃 아이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한다. 누가 나오든 다같이 뭉쳐서 놀이를 정한다. 매일 똑같은 길을 뛰어다니고 술래잡기나 ‘무궁화가 피었습니다!’를 외치면서, 그 길 하나만큼 재미있는 놀이터가 없었을 거다.
지금 그 지역으로 가보면 길은 포장되고 새 빌딩들이 들어선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스무살이 넘어서 돌아가본 우리집 근처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풀밭은 사라져 버렸다. 옛날의 그 풍경은 정말 찾아볼 수 없기에, 시골은 그리운 추억으로 되짚는 한 시절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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