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홀씨가 하늘하늘 날아갔다. 관에 누어계신 주평선생의 노구가 그의 수필 제목처럼 민들레 홀씨를 닮았다. 그러나 그 갸냘픈 몸에 담긴 예술혼은 거목의 것이었다. 세대를 아우르며 80평생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 아동극 창달을 위해 외로운 고난을 감내해오신 구도자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의 불타는 열정과 장인정신은 폭죽처럼 눈부셨다.
장례식에서 선생의 긴 생애의 발자취를 읽었다. 한줄이라도 빼면 깐깐하신 성격에 야단치실 게 분명했다. 그와의 20여년 문학과 인간적 인연을 마치 함께 손을 잡고 걷는 것처럼 또박또박 짚어갔다.
다 읽고 머리를 드는 순간, 그가 마지막 인생 무대의 막이 내리고 많은 관중들의 기립 박수소리를 들으며 퇴장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분장도 지우지 않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내 멋있제이?...”
주평선생을 처음 뵌 건 1990년, 북가주 처음으로 열린 “맹진사댁 경사”라는 연극무대에서 였다. 이곳에 극단「금문교」를 만드신 후 올린 작품이었다. 당시 무대예술에 목말랐던 교포사회의 열띤 갈채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 후, 선생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춘향전’, ‘효녀 심청’등을 무대에 올리며 황무지같던 이민 연극예술에 불을 지피셨다.
“시집가는 날”에서 잇발빠진 맹노인으로 춤을 덩실덩실 추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쩌면 저다지도 신명나실까? 피가 마르고 뼈에 사무치도록 평생 해오신 연극이 아직도 새신랑 신부맞듯 좋으실까? 주평선생을 뵈면, 예술은 손끝이나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님을 새삼 느꼈었다. 굿하듯 신을 다하고, 온 몸과 혼을 송두리째 내 던지고 불사르듯 하신다. 평생 연극으로 살아오셨음에도 늘 예술이 “하늘 같이” 좋았던 분이셨다.
주평이란 필명은 개구리 풀이란 뜻이다. 물에 떠다니는 부평초. 그에게 예술은 인생을 던질 만큼 고귀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그는 부평초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갈망했다. 부모님과 가족들의 반대, 주위의 무관심과 흘대, 이민사회의 열악한 환경, 심지어 노년에 겹쳤던 지병과 실명상태도 그를 막아서지 못했다.
선생과 나는 오랫동안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 판에 칼럼을 써왔다. “김형, 글 쓰는 사람은 글로 승부 해야 합니다. 작가가 자랑할 건 좋은 글밖에 없습니다” 2000년 초, <현대수필>지에 막 등단한 나에게 당신의 수필집을 주시며 하신 말씀이었다. 그리고 수년 뒤, 내 첫 수필집, <불타는 숲> 첫 장을 열어 내 이름 곁에 문학 동인(同人)이라고 큼지막한 달필로 써 주셨다.
작년부터 선생은 나와 두가지 약속을 하셨다. 하나는 병세가 좀 나아지면 우리집에 친히 오셔서 집사람이 모아둔 당신의 동화와 전집들을 돌아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준비하고있는 다음 졸작수필집에 서문을 써주시는 것이었다.
몇번 오시려다가 갑자기 병세가 심해져서 결국 못오시고 말았다. 내 수필집은 자꾸 미루어져 결국 두 약속 다 지켜드리지 못했다. 그나마 선생 곁에서 간간히 말동무가 되드렸던 게 위로가 된다.
선생께선 돌아가시기 직전에 발표하신 수필 “늙은 사슴의 독백”에서 가족들에게 평생 끼친 누(累)에 용서까지 구하고 가셨다. 한 노작가의 곁에서 목숨을 건 사명감과 치열했던 예술혼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며 큰 배움을 얻었다.
20년 전, 그의 첫 이민 수필집 “막은 오르고 막은 내리고”에서 선생은 당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직접 쓰셨다. “아동극을 위해 태어나 아동극을 위해 살다간 ‘주평’, 여기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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