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도, 미국으로 이민온 지 13년만에 시민이 되었다. 이미 18세가 지난 시기였기 때문에 시민권 시험과 선서식을 체험할 수 있었다. 어떤 합법신분을 유지하고 확정하기 위한 참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영주권을 위해 이민국으로 가서 바랜 조명아래 대기한 후, 사진과 이상한 기계에 손을 얹었던 생각이 난다.
이른 아침에 일어난 것만 해도 짜증났는데, 이민국 오피스는 읽으면서 기다릴 만한 매거진 하나조차 없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매달려서 재촉했다. 언제 끝나? 언제 우리 차례야? 아직 멀었어? 차안에서 기다리면 안돼? …영주권이라는 게 뭔지 실감했을 리가 없을 것같다. 국적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을 나이였듯이, 외국땅에서 ‘합법신분’을 얻고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랐다.
대학교때 가게 된 선서식도 이 사실은 내게 와닿지 않았다. 얼마나 관심이 없었으면 판사가 발표하는 도중에 졸았겠는가. 그때 함께했던 아빠는 그 광경이 꽤나 어이없었을 것이다. 드디어 오바마 대통령이 축하의 말씀을 하는 동영상이 나오고, 나는 눈을 부릅 떴다. 아빠가 내 옆에서 선서식에 같이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켰다. 꽉 찬 강당에 여러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눈물 흘리며 가족들과 포옹하고, 꽃다발을 들며 기념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는 이 사람들이 얼마나 뼈빠지게 일하고, 조마조마해가면서 시민권자가 된 건지 모를 거야… 그토록 중대한 이벤트에서 잠드는 너도 참 웃긴애다…선서식 때의 기억을 되돌리면 헛웃음이 나온다. 내가 웃긴애가 맞았다. 내 국적과 관련된 정체성과 시민권의 무게감은 요새 일을 시작하면서 많이 느끼고 있다.
봉사회에서 이민 도움을 받으시는 분들의 사연을 접할 때 이제서야 우리 가족의 이민 과정은 정말로 순조로웠다는 걸 알겠다. 그 과정의 단계를 생각하면서 철저하게 살림을 꾸려나간 부모님에 대한 존경 또한 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은 내게 점점 더 집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물론 한국사람의 정서는 내게 너무나 익숙하고, 언어소통이 되는 덕분에 여전히 미국사람 다됐다는 소리는 안 듣는다. 하지만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불편함을 먼저 느끼고, 한국의 도시들과 동네들을 거쳐가며 미국의 넓은 도시풍경을 그리는 나를 발견한다. 서서히 시민권을 향해 거쳐온 과정의 시간이 지난 사이, 내 국적에 대한 정체성도 변해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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