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그림, 정직하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화산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시스모그래프처럼 폭풍처럼 몰아치는 젊음의 열정을 캔버스에 옮기기위해 나는 추상표현주의를 택했었다. 불길이 한소큼 잦아들자 얼마간의 방황끝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소박하며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갖고있는듯 내게 느껴지던 동그라미를 그렸다.
어린아이가 엄마 아빠를 표현하기의해 그려놓는 동그라미, 인간 모두가 끈임없이 갈구해 마지않는 인간사회에서의 approve를 나타내는 동그라미,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을 상징하는 동그라미, 뫼비우스의 띠처럼 탄생과 소멸의 끝없는 고리를 말하는 동그라미, 너와 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어제 스친사람과 미래에 만나게 될 사람. 사랑하던 사람과 미워하던 사람.. 그 모든 의미를 함축시킨 동그라미를 한동안 끝도 없이 되풀이 그렸었다.
묵주기도 같기도 했고 한 발 한 발 내딛는 매일의 숨소리 같기도 했다. 동그라미를 그리는 동안 묵상하듯 행복했고 따스하며 가슴 가득한 충족감을 느낄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작업은 또한 육체의 소진이었다.
한번 붓을 잡으면 6시간, 8시간, 끝없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많이 육체적으로 아팠다. 내가 집에서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간절히 답을 찾아 생각하던 중 우연히 중세의 수도자중 성경을 필사하는 일이 일생의 일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수도자의 삶을 늘 동경하면서도 그 무섭다는 규칙, 순명 등이 상상만으로도 겨워 내게는 꿈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는 그 생활이 성경필사라면 아주 쉽게 나도 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사를 하기로 하자 단순히 책의 형태로가 아닌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두루마리에다 쓰고 싶었다. (역시 나는 화가다.)
종이를 장만하고 틈틈이 필사를 했다. 쓰기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사실 무엇을 위해서라든가 얼마나, 혹은 언제까지 하겠다는 작정은 전혀 없었다. 그냥 쓰면서 행복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쓰는 그 시간동안, 마치 흐르는 물위에서 혼자 떠내려가는 배처럼 내가 오랜 세월 내가 지니고 있던 화가라는 자의식을 어느결에 까마득히 잊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난 20년동안 산호세에서 헌터스포인트의 스튜디오로 다닐 때 그림은늘 나를 안달케하는 야속한 연인 같았다. 정직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염원만큼이나 나는 사회의 인정이 받고 싶었고 그에 따른 명성이나 돈, 그리고 칭송하는 이들이 뭉게뭉게 밀려오기를 소망했었다.
성경을 필사하던 그시간들, 그 행위는 나를 잠깐 딴데 정신이 팔려 있는동안 물결에 따라 그냥 떠내려온 표류자로 만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 주위를 돌아보자 이제까지 나를 구속하고 호령하며 다구치던, 잘 낫지 않는 부스럼처럼 덕지덕지 붙이고 살던 많은 헛된 욕심이 바람에 날려간 구름처럼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이제야 나는 스튜디오를 내놓을수 있겠구나. 어디 내 그림을 맡아줄 화랑 없나 두리번 거리지 않으면서도 그냥 계속 그릴 수 있겠구나.
화랑과의 연계때문에 죽자고 붙잡고 있던 한시간 드라이브 거리의 작업실을 드디어 내놓을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기뻐 뛰게 했다. 그냥 이대로 평화롭고 온유하며 행복했다. 그동안 쓴 성경을 하늘을 향해 주렁주렁 널어놓을 이번 installation, “The Light Is On For You”는은 그동안 사랑했던 연인에게 바치는 작별의 의식이다.
언젠가 death valley 에 가서 이 두루마리를 광활한 하늘 아래 길게 펴놓고 싶다는 소망은 있지만 그것 역시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이나 의지는 없다. 흐르는 대로 그 꿈이 이루어지면 즐겁겠지만 꿈으로 끝난다하더라도 여전히 나는 행복 할 것이다. 삶이 나를 늘 좋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라 믿고 나는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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