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뉴스에서 중세의 영국왕 리차드 3세의 장례가 530년만에 열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난 2012년 8월 영국 레스터시의 주차장 밑에서 발견된 유해가 세익스피어의 “리차드 3세” 희곡의 주인공이자 영국 요크왕조 최후의 왕인 리차드 3세라는 것이 몇달간의 DNA 대조분석으로 확인되어 전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된 이후, 몇년간에 걸쳐 어디에 시신을 안치할 지에 관한 지루한 법정공방 끝에 마침내 친척들과 영국왕실의 호위 속에 레스터 성당에 편안히 안치된 것이다.
지난 여름 우리가족은 친구들과 함께 오레곤주의 애쉴랜드시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일년이면 구개월을 셰익스피어 축제를 하며 3개의 소극장에서 연일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공연하는 인구 2만의 작은 문화 소도시 오레곤에 몇십년째 꾸준히 발도장을 찍어온 친구의 초대에 조금은 색다른 휴가를 즐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스탠포드 외과의사 출신의 벤처투가가로 셰익스피어에 깊게 빠져있는 이 친구는 이미 몇십번을 관람했던 리차드 3세 공연의 희곡대사를 줄줄 외워가며 이번에 발견된 시신분석을 통해 리차드 3세는 단지 척추측만증을 앓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이를 일부러 흉칙한 곱사등이 폭군으로 묘사했던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튜더왕조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정치적 왜곡이었다고 열변을 토했다.
영문학의 거장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따로 원서로 찾아 읽은 적도 수많은 엘리자베스와 리차드와 에드워드가 나오는 영국왕가의 계보에 특별히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던 나였지만은 칠월의 한여름밤에 좋은 사람들과 공기좋고 산좋은 작은 마을 야외 소극장에 앉아서 세계적인 배우들의 힘찬 숨소리를 느끼며 오백여년이 지나서야 밝혀지는 권력다툼의 진실을 생각하다보니 리차드 3세가 얼마나 가깝게 느껴지던지.
장미전쟁에 패한 이후 오백년이란 긴세월동안 폭군으로만 알려져 있던 군주를 현대의학과 과학의 힘을 빌어 명예를 복원시키고 온나라 전체가 나서 적절한 경의를 표해주는 성숙함, 팔십년 가까이 작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미국 서부 작은 도시에서 셰익스피어의 37개 전작품을 삼백회가 넘게 공연하며 문화적 전통을 지켜온 자부심, 실리콘밸리 트렌드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중세문학과 예술을 쫒으며 하프시코드를 직접 제작하고 애쉴랜드 소극장재단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벤처투자가의 우직함. 참 고맙기가 그지없다. 세상을 꽤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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