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프로그램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주제로 다루는 것을 보았다. 재판이 원고와 피고의 사정을 다 들어봐야 하듯 시어머니는 나름대로 서운함, 며느리는 그의 입장에서 억울함, 서로가 자기 의견만 옳다고 주장한다. 견원지간의 이 관계는 하나님이라도 어느 한쪽 편 들어주기 힘들다. 중간에 끼어 있는 아들이자 남편의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떤 남편은 어머니를 포기하고 어떤 남편은 아내를 포기해야 한다. 진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는 것인가?
마음 약한 남편은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새끼 때문에 만사 포기하지만 쎈 남편은 다르다. 네가 내 부모 모시고 안 모시는 것이 네 자유이듯 나도 너와 살고 안 사는 것이 내 자유다라고 냉정하게 선언해 버린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와 같이 사는 한 며느리가 어느날 아침 시어머니가 나가신 줄 알고 친구와 전화로 “그 늙은 여우가 횟 대박을 뒤집어쓰고 나갔단다”라고 말할 때 무얼 잊어 버리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시어머니가 마침 현관에서 그걸 듣고 아들에게 노발대발해서 아들이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즈음 시어머니가 경비실에 음식 갖다 놓는 것은 낡은 버전이다.
택배로 부쳐도 싫다는 것이 새 버전이다. 아들은 더이상 내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의 남편이 되어 버렸다. 나의 어머니는 당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겼다고, 새 밥은 시어머니에게 드리고 헌 밥은 당신이 드시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고 늘 말씀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어른 공경이 뼈에 박혔고 어른 때문에 손해보는 것을 손해로 여길 수 없는 삶을 가슴으로 몸으로 사셨다.
손이 투박하게 변해도 얼굴이 힘든 일에 굵게 늙어가도 허리가 꼬부라져 가도 그것은 조금도 억울한 것이 아니었으며 당연히 살아야 할 아낙의 삶이었다. 아름다운 전설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시어머니가 며느리 모시는 시대가 되버렸다. 예약없이 방문하면 안된다. 잔소리하면 안될 뿐만 아니라 요청하기 전에는 하고 싶다고 할말 다하면 안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결혼하고 싶다고 데려온 여자도 마음대로 거절 못한다.
그래서 아들이 생활비 안주더라도 당연히 여기고 대신 나라가 효자가 돼버렸다. 날짜도 시간도 틀리지 않고 생활비를 보내준다.
아파도 책임지고 집도 책임진다. 그런데 왜 아직도 아들 선호사상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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