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 어버이날 큰딸 내외가 차려준 큰 상과 세 딸이 모아준 큰 선물을 받았다. 큰딸은 나와 같이 산호세에 살지만 두 딸들은 서울에 살기에 전화를 해서 ‘happy mother’s day’라고 입카드를 보냈다. 세 딸의 사랑이 가득한 마음과 선물을 받으니 세상 부럽지 않다.
내 딸들은 어려서부터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어머니라고 한번도 부르지 않는다. 다른 말은 존댓말로 가르쳤어도 엄마만큼은 그냥 놔두었다. 왜냐하면 실은 나도 대물림처럼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엄마라고 불렀지 어머니라고 안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는 사남일녀였는데 그중에 셋째아들의 효심이 가장 지극 정성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꼭 엄마 엄마해서 우리 어머니는 그게 늘 불만이셨다. 그 동생에게 너 엄마라고 하지 말고 어머니라고 해 드려라고 말하면 씩 웃고 만다. 어머니라고 하면 일미터쯤 멀어지는 거 같다는 미소다.
오빠가 남미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이 동생이 어머니를 오래도록 모셨는데 올케는 아이들 때문에 서울에 살고 여수에서 근무해야 하는 이 동생이 어머니를 낮에는 휠체어를 차에 옮겨가며 양로원에 맡기고 밤에는 모셔다 사는 생활을 했다. 주말에 가보면 잘 마르지 않는 이불 빨래가 베란다에 쇼파에 이불 공장마냥 널려 있는데 치매기가 있는 어머니가 기저귀가 갑갑하니까 자꾸 빼버리는 바람에 온 이불마다 발라 놓으셔서 옷이랑 이불 빨래가 장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는 엄마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서 늘 행복이 꽉찬 얼굴이다.
사실 그 시절의 많은 어머니들이 지금의 어머니와는 삶 자체가 달랐겠지만 특히 우리 어머니는 시골에서 우리집만 바라보고 올라오는 온갖 친척들 뒷치닥거리로 온 인생을 희생한 삶을 사셨다. 그러나 신세진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마지막에는 교회의 지하 구석방에서 구닥다리 T.V만 쳐다보시다 가셨다. 이름이 복지관이지 하루종일 혼자 누워 있어야 하는 외로움의 극치였다.
나는 지금도 엄마를 끝까지 돌보고 사랑 해드리지 못한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 내 손을 잡고 자기와 살자고 애원하신 엄마에게 큰딸네 아이 한달만 돌보아주고 돌아오겠다고 거짓말하고 도망온 죄책감으로 양심이 아프고 마음의 피눈물이 마르지를 않는다. 어버이날이라고 내 딸들에게서 과연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가책이 들고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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