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호째 발간한 1976년 3월26일자(금) 한국일보 미주판(왼쪽). 1970년대 초반 D.C. 펜실베니아 애비뉴의 이 빌딩 지하층에 신문사가 있었다. 현재 멀로즈 호텔이 입주해 있다.
1970년 5월1일 DC에 첫 발
항공편으로 온 본국지 배포
1974년 자체 제작판 첫 발행
내셔널 프레스빌딩서 첫 출발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70년 5월1일. 한국일보 조세형 워싱턴 특파원은 D.C. 14가의 내셔널 프레스 빌딩 안에 한국일보 워싱턴 지국을 개설했다. 한국일보가 세계의 수도 워싱턴에 첫발을 내딛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초대 지국장은 당시 마흔 살이던 조 특파원. 그는 훗날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고 정계에 투신해 4선 의원을 지내다 2009년 타계했다.
조 특파원은 노스웨스트 항공(NWA) 편으로 공수되어 오는 한국일보를 받아 배포하기 시작했다. 신문이라지만 8면에 불과했다. 배달 부수도 200부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문 외에는 모국 소식을 들을 길이 없는 당시에 한국일보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 특파원이 운영하던 워싱턴 지국은 이듬해인 1971년 10월15일 유태희 씨가 인수하면서 1년여 만에 전기를 맞게 된다.
유태희 사장 인수
한국일보 장기영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그는 캘리포니아를 거쳐 71년 9월 워싱턴에 도착해 인수 준비에 들어갔다. 단신으로 워싱턴에 온 그는 조세형 특파원과 내셔널 프레스 빌딩의 지국 사무실에서 함께 먹고 자며 인수 채비를 마쳤다.
캘리포니아에 머물고 있던 그의 부인 유정자 씨와 2명의 아들이 72년 1월 워싱턴에 합류했다. 얼마 뒤 유태희 초대 사장(작고)은 메릴랜드 베데스다의 코델(Cordell) 애비뉴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했다. 첫 한국일보 사옥인 셈이다.
아직까지 신문은 본국지를 받아 배포하는 수준이었다. 직원이라고는 유태희 사장과 부인 단 두 사람뿐이었다. 부인 유정자 씨의 증언이다.
“당시에 뉴욕 한국일보에는 자체 인쇄시설이 있었어요. 뉴욕에서 본국지 광고를 워싱턴 지역 광고로 바꿔 인쇄한 다음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매일 보내줬어요.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의 버스 정류장에서 그걸 찾아 제가 별도의 종이에 독자 주소를 타이핑해서 신문에 둘둘 말아 우체국에 갖다 줬습니다. 2종 우편물로 독자들에게 부치는 거지요. 독자도 많지 않은데다 열악하고 힘든 시기였지요.”
미주판 첫 발행
한국일보는 사옥을 워싱턴 D.C.의 조지 워싱턴대 병원 근처로 옮겼다. 2430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 위치한 빌딩의 지하에 방 한 칸을 빌린 것이다. 현재 이 빌딩은 멀로즈 호텔(The Melrose Georgetown)이 들어서 있다.
본국지 배포 수준에서 처음으로 미주 판(워싱턴 판)이 자체 제작된 건 1974년 4월이었다. 한국에서 유석희 씨가 그해 2월 말 워싱턴으로 오면서 한국일보는 비로소 자체 면을 제작하면서 미국사회와 워싱턴 한인사회 소식을 알릴 수 있게 됐다.
“가능하면 신문의 날 주간에 맞춰 4월 둘째 주에 미주소식판 1호를 발간했습니다. 미주소식판은 1주일에 한 번 토요일 자에 냈는데 그해 말부터는 미주 한국으로 이름을 바꿨어요. 77년 9월부터는 주 2회로 늘렸어요. 유태희 사장이 광고를 맡고 내가 취재와 편집을 했습니다. 인쇄는 실버스프링에 있는 미국 신문사인 서버번 레코드(Suburban Record) 사에서 했어요.”
74년부터 한국일보와 인연을 맺고 편집국장과 사장을 지낸 유석희 씨의 회고다.
당시 신문은 뉴욕 지사에서 보내준 한글 金 타자기의 글자를 타이핑해서 70% 축약시켜 인쇄하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타이핑은 주로 유정자 씨가 담당했으며 광고가 늘면서 도안과 구독료 청구서를 보내는 일도 맡았다.
윤전기 도입
70년대를 거치며 한국에서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워싱턴 지역의 한인 인구는 급증했다. 덩달아 신문도 확장되기 시작한다. 격동의 시대이기도 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전두환 군사정권의 출범 등 모국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굵직한 뉴스들이 터져 나왔다. 모국 소식에 목말라 하는 한인들에 신문은 유일한 창구였다.
한국일보도 사옥을 D.C.의 듀폰 서클에서 가까운 21가로 옮겼다가 80년대 초반 메릴랜드 조지아 애비뉴의 2층 건물을 매입해 사무실 겸 공장으로 사용하게 된다.
82년에는 자체 윤전기(King Press)를 도입하며 제2의 창간 시대를 맞는다. 그리고 주 5회 미주판을 발행하면서 공식적인 일간지 체제로 돌입했다. 직원 수도 처음의 3명에서 9명으로 늘었다.
86년에는 현재의 업소록을 처음으로 발간하며 한인사회의 비즈니스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87년 3월, DC의 캔사스 애비뉴(Kansas Ave)로 확장 이전했다. 1층은 인쇄 공장이며 2층은 사무실로 사용했다. 91년에는 맥킨토시 컴퓨터 시스템(CTS)을 도입, 신문 제작기술의 진보를 꾀했다.
94년 무렵에는 파트타임 직원까지 합쳐 45명으로 직원이 늘었고 매일 36-40면을 1만부씩 발행했다. 리치몬드와 플로리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지국을, 볼티모어와 마이애미에 영업사무소를 둘 정도로 성장했다.
98년부터는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편집국에서 원고지가 사라졌다. 이듬해부터는 1면을 컬러 제작해 워싱턴에서 처음으로 컬러신문 시대를 열었다.
미주본사 직영으로 변신
그 동안 유태희 사장이 독립 운영하던 한국일보는 2000년 1월부터는 미주본사(회장 장재민) 직영체제로 바뀌었다. 사옥도 4월 1일 한인 타운으로 자리 잡은 버지니아 애난데일로 이전하고 D.C. 캔사스 애비뉴의 사옥은 인쇄공장으로만 운영했다.
새 천년을 맞아 급변하는 언론시장 환경에 대응하는 다각적인 모색과 역동적 변화가 추구됐다. 2001년 일간스포츠를 동시 발행하며 스포츠 신문 시대를 열었다. 또 최신식 윤전기(GOSS)를 도입하면서 2003년에는 본국지와 미주판 각 24면, 특집판 16면, 스포츠 16면 등 총 80면을 발행하였고 석간에서 조간체제로의 개편도 단행됐다.
신문 배달 시스템도 획기적으로 개선돼 2002년 워싱턴 최초로 신문 직배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독자들은 종전에 우체부를 통해 1-2일씩 늦게 받아보던 신문을 그날 받아볼 수 있게 됐다. 한식당 등 80여 곳에 가판대를 마련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 시기 한국일보는 직원도 60명에 가까웠으며 정상의 신문으로서의 위상과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2011년 3월부터는 인쇄공장과 시설을 매각하고 USA TODAY에서 운영하는 Garnett에서 인쇄를 시작했다.
문화 함양과 봉사
한국일보는 지난 45년간 모국과 미국의 소식을 전하고 미국생활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제공해왔으며 동포사회가 올바로 설 수 있도록 계도하는 역할을 해왔다. 또 각종 문화예술, 스포츠 행사 개최와 지원 등 사회봉사 활동에도 앞장서며 동포사회 발전을 도왔다. 한국일보의 역사는 워싱턴 한인사회의 얼굴이자 역사였다.
1968년 도미한 이래 창간 독자인 이규원 씨(페어팩스)는 “한국일보 없는 동포사회는 상상도 할 수 없으며 한인 이민사에 아로새겨진 한국일보의 노고와 헌신은 빛나는 광휘”라며 “앞으로도 한국일보의 역할과 기여는 변함없이 계속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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