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 한정주 지음·다산초당 펴냄
연구자에 따라 다르지만,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의 호(號)는 무려 500여 개에 달한다.
가족 휴대전화 번호도 기억하지 못하는 요즘엔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일. 추사를 유별난 케이스로 쳐도 마찬가지. 당시 선비들은 태어날 때 부모에게서 받은 이름과 관례를 치르며 얻는 자(字), 살면서 최소한 서너 번 바뀌는 호가 있었다. 공적인 문서와 사적인 문집, 행장(평전) 등에서 누군가를 제대로 찾으려면 이를 모두 알아야 했다.
친구끼리도 이름 대신 자나 호 같은 별칭으로 불렀고, 특히 윗사람의 이름이나 자를 입에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호는 경우에 따라 ‘추사 선생’처럼 존칭을 더해 부를 수 있었다. 호는 부모나 스승이 지어주기도 했지만, 스스로 불리고 싶어하는 이름으로 언제든 바꿀 수 있었기 때문. 그런만큼 호는 한 인물의 연구에서 성향이나 의지, 내면을 엿보는 중요한 자료요, 나아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말하는 키워드다.
율곡 이이나 교산 허균, 연암 박지원은 좋아하는 지명에서 호를 가져왔고, 취금헌 박팽년이나 매월당 김시습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취향을 반영했다. 단원 김홍도나 완당 김정희는 존경하는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빌렸고, 면앙정 송순이나 남명 조식은 고전명구에서 따왔다.
다시 김정희로 돌아오면, 그의 호로 잘 알려진 것은 추사(秋史)와 완당(阮堂). ‘엄격한 금석학자’ 정도로 풀이되는 호 ‘추사’는 그가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낸 것에 힘입었다. 반면 당대 중국 최고의 학자로 꼽혔던 완원의 이름을 따 지은 ‘완당’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호로 보는 학자도 있다. 스승이던 박제가가 죽은 뒤 교류한 완원의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40여 년 완원과 교류하며 청조학(淸朝學)의 일인자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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