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금융위기가 오는 것을 보지 못한 위대한 위기 관리자다.”
지난 2013년 말 버냉키 전 FRB 의장의 퇴임을 앞두고 ‘글로벌 금융위기의 소방수’라는 극찬이 쏟아진 가운데 일각에서 나온 비아냥거림이다. 버냉키 전 의장이 FRB 이사 시절 월가 규제완화나 주택거품에 안이하게 대처해 금융위기를 촉발하는데 한몫했다는 것이다. 버냉키 전 의장은 개인적으로도 부동산 버블이 한창이던 2004년 84만달러짜리 주택을 구입했다가 큰 손실을 보기도 했다.
양적완화 등 역사상 유례없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이 또 다른 금융위기를 부를 수도 있는 만큼 공과 평가는 이르다는 것이 비판론자들의 요지였다. 실제로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도 저금리 정책으로 골디락스(저물가 속 고성장) 경제를 이끌면서 재임시절에는 마에스트로(거장)로 추앙됐지만 지금은 금융위기의 주범이라는 오명만 남았다.
이제 각국 중앙은행의 신뢰도는 중국 발 글로벌 금융시장 혼란으로 또다시 시험대에 오른 모양새다. 중국 인민은행의 경우 기습적인 위안화 평가절하로 금융 불안을 오히려 부채질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도 내놓지 않았던 통화가치 절하에 중국 경기 둔화의 우려만 커진 탓이다. 이 때문에 기준금리와 지급 준비율 동시 인하에 이어 단기 유동성 공급 등의 부양책을 연일 내놓으며 시장의 불안감 달래기에 급급하다.
신뢰도 하락위기를 겪기는 FRB도 마찬가지다. 중국 발 혼란에 달러화 강세, 수입물가 상승 등 후폭풍이 불면서 평소 FRB의 신호와는 달리 오는 9월 기준금리 인상은 물 건너가는 모양새다. FRB가 지나치게 좌고우면하다 중국의 위안화 평가절하에 선수를 뺏기면서 통화정책 정상화 시기를 놓쳤다는 비판도 나온다. 유럽·일본에서도 추가 양적완화가 가시권에 들고 있다. 천문학적인 유동성을 뿌렸는데도 실물경제가 살아나지 않으면서 비전통적 통화정책에 대한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
물론 각국 중앙은행이 시장과의 힘겨루기에서 패배했다고 보기에는 이르다. 또 중국 발 불안이 2008년과 같은 대형 금융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낮다는 점에서 일각의 ‘9월 위기설’은 과장된 측면이 크다. 신흥국은 외환보유액, 변동환율제, 낮은 단기외채 비중 등의 측면에서 1990년대 외환위기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하지만 최근 금융 불안을 계기로 중앙은행의 근본적 한계가 폭로되고 있다는 것이 우려 요인이다. 그동안 중앙은행들은 재정이 고갈된 정부 대신 본연의 업무인 물가 안정은 팽개치고 경기부양의 최전선으로 내몰렸다. 당초 불가능한 임무를 부여받은 셈이다. “중앙은행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라”는 라구람 라잔 인도 중앙은행 총재의 반발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중앙은행의 비명쯤으로 들린다.
이와 맞물려 ‘전지전능한 중앙은행’이라는 허상도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최근의 금융시장 패닉은 글로벌 경기 둔화와 맞물려 초저금리로 쌓아올린 자산거품의 붕괴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중앙은행에 대한 투자가들의 신뢰’라는 마지막 거품이 터지면서 시장 변동성이 증폭되고 있다.
실제로 각국 중앙은행의 정책 실탄은 거의 고갈 직전이다. 경기부양 수단이 풍부한 곳은 중국 정도에 불과하다. FRB의 경우 ‘포워드 가이던스’(통화정책 선제안내)라는 일종의 말장난으로 통화정책의 외줄 타기를 해왔다. 일각에서는 양적완화 조치를 다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연준의 신뢰도만 추락할 것이 뻔하다.
현재 중앙은행발 거품잔치는 복잡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FRB는 ‘출구전략’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한 발 다가간 반면 다른 중앙은행들은 돈 풀기를 지속하면서 파장이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물론 FRB는 연내 기준금리를 인상해도 점진적인 통화정책 정상화를 예고하고 있고 글로벌 경제에도 큰 충격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미지의 영역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재닛 옐런 FRB 의장마저 확신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중앙은행은 이제 더 이상 ‘마지막 안식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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