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드로 윌슨 대통령 기념관 The President Woodrow House
우드로 윌슨 대통령 기념관 입구, 입구에 서있는 사인. 인디언의 피가 흐른다는 두번째 부인 에디스. 아버지를 위하여 연주하던 피아노 위에 놓인 첫째딸 마가렛과 윌슨의 사진.첫째부인 엘렌과 딸들. (시계반대 방향)
윌슨의 병상 생활공간이었던 2층엔...
이승만과 윌슨
윌슨 대통령 하면 ‘그 분 때문에 헛물 킨 우리 한국인들’이란 생각이 들며 묘한 느낌을 갖는다. 그는 학자로서 그래도 자기 소신을 정치에 많이 반영시킨 대통령이기는 하다. 그리고 한국과 악연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그와 한국과의 두 가지의 불편한 관계를 이야기 해야겠다.
하나, 프린스턴 대학 내에 공공정책대학인 우드로 윌슨 대학(Woodrow Wilson)이 있고, 2010년 이승만 대통령의 박사학위 취득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에서 뜻있는 분들이 돈을 모아 대학에 증여했다. 그래서 그 학교 내에 이승만 홀(Syngman Rhee Hall)이 생기고, 그 분의 동상이 벽에 걸려있다.
이승만 대통령도 젊은 시절 자기가 왕족(Royal Family)이라고 뻥도 치는 등 허세를 부린 적도 있지만, 사실 윌슨 대통령이 프린스턴 대학 총장일 때에 어느 정도 그와 친분도 있었던 것 같다. 이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상해임시 정부 초대 대통령이 된 것 중 하나가 ‘나 윌슨 대통령 잘 안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윌슨은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면회 요청도 거절해서 그를 만나지도 못했다.(나중에 퇴임 후에 병석에 누워서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민족 자결주의
또 하나, 세계 제1차 대전 때에 미국은 전쟁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1917 년 참전을 했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등에 무기제공과 차관 제공으로 맏형 노릇을 하다가 종전 후 1919년에 국제연맹의 산파역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고, 노벨상도 받고 할 때에 소위 ‘민족 자결주의’ 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민족 자결주의의 개념과 범위의 세계라는 것은 유럽에다가 그저 일본 정도 하나 끼워 주는 정도이었지, 아시아 특히 한국 같은 나라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속된 말로 김칫국을 마셨는지 한국 백성들이 때는 왔다 하고 3.1 만세, 독립운동을 벌였다. 물론 진정한 애국심의 발로이었고, 임시정부 설립의 동기가 되는 등 그 운동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의 흐름을 읽을 능력도 없어 윌슨의 말을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사실 그는 미국을 위한 미국의 대통령이었지 세계의 정의와 질서를 위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한국인들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프린스턴대 총장, 뉴저지 주지사 역임
그의 일대기를 보자면 1856년에 태어나서 1926년까지 살았고, 1902년부터 191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 총장을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10년 박사학위를 받음)
그리고 1911년부터 2년간 뉴저지 주지사를 거쳐, 1913년부터 1921년까지 8년간 미국 28 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리고 재임 중 여러 법안을 제정했다. 1919년 수정 헌법 19조인 여성 참정권부터 연방 준비은행법, 연방 무역법, 독점 방지법 등 학자 출신으로서 그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2기 대통령 후반 시절부터 병마와 싸우다가 결국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지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윌슨에 대한 평가를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그것이 그의 미국인의 눈높이에서 그리고 좋은 의미에서 평가한 글을 소개한다.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가르쳤고, 아브라함 링컨은 민주주의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가르쳤고, 윌슨 대통령은 미국 내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빅토리아 양식의 집
이렇게 정리된 생각을 갖고 윌슨 기념관을 찾았다. 그곳은 워싱턴 D.C. S St. 에 있다. 그리고 그 길에는 미얀마, 라오스 등 대사관 3 또는 4층 건물들이 즐비한 가운데에 있다. 아마도 사무실과 대사들의 숙소를 겸한 건물로 보인다.
기념관 역시 3층 건물이다. 이 건물의 소유주는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영화배우가 아니다) 이었는데 윌슨 대통령이 이 건물을 사기 원하니 당시 가격보다 훨씬 비싼 15만 불로 불렀다 한다. 그런데도 윌슨 대통령이 노벨상 받은 돈 5만 불에다 프린스턴 총장 시절부터 모아온 10만 불을 보태 샀다고 한다.
문에 들어서니 가이드 한 명은 한 팀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고 있고, 다른 가이드가 빨리 오라며 우크라이나에서 온 팀에 합류시켜 주었다. 투어는 윌슨 대통령의 조카이자 비서의 사무실인 입구에 있는 응접실에서 시작되었다. 부엌, 응접실, 다이닝 룸 등은 여태껏 보아온 1920년 시대에 상류사회의 빅토리아 양식의 집으로 별로 건물 자체로는 특이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병석에서 그의 생활공간이 되어버린 2층에는 흥미로운 것이 많았다.
한 방에는 대통령 재임 시 받은 것들이 진열되었는데, 베네딕트 교황의 모세 그림, 적십자 에서 감사 표시로 보낸 조각품, 프랑스에서 보낸 타페스트리, 영국 왕가의 사진들과 탁상 등이 있었다.
또 한방에는 대통령 시절 라디오 방담하던 소품들이 그대로 옮겨져 와 있었고, 당시 무성 영화 영사기가 있었는데 그는 배우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의 모험 활극을 즐겼다고 한다. 옆에 작은 방이 있는데 간호사가 상주하고 있었고, 심장이 멈추면 쓰던 전기충격 기구가 보이고, 옆에 창으로 된 발코니에서 휠체어에 앉아서 내려다 보았다는 정원 모습이 꽤나 애처롭게 보였다.
두 번째 부인
그는 말년에는 침대에서 식사를 했는데 마주보는 벽에 두 번째 부인 초상화가 붙어 있었는데 보기 싫다며 사별한 첫째 부인 초상화로 바꾸어 달라고 해서 그곳이 첫째부인 초상화가 있고, 두 번째 부인 초상화는 윌슨 대통령이 잘 못 보게 침대 쪽에 붙어 있어 쓴 웃음이 지어졌다.
그의 첫째 부인이 엘렌 루이스이었는데 무척 사랑했었고, 4명의 딸을 두었다. 첫째 딸 이름이 마가렛인데 엘렌이 죽고 윌슨 대통령이 두 번째 부인을 얻기 전 한 2 년간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한다. 평생을 홀로 지내며 아버지를 극진히 사랑하였고 피아니스트이었다.
두 번째 부인의 이름은 에디스이었는데 바로 1불짜리 동전에 아기를 업고 있는 인디안 포카 혼타스의 후예라고 그리고 그것이 자랑스럽다고 늘 이야기했다 한다. 그녀는 1961년까지 살았다.
우리에게도 그리고 세계가 요동치던 시대에 잠시 빠져 있었던 두 시간의 여행, 값진 시간이었다.
●주소: 2340 S. St. NW Wash DC 20008 ●전화: (202)387-4062
●개장시간: 화-일요일 오전 10:00-오후 4:00
●입장료: 10달러(시니어 8달러)
●주차: 길가에 미터기가 없이 주차할 수 있으나 조금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 영 묵
미주 서울대 총동창회장 역임
워싱턴 문인회 회장 역임
한국 소설가협회 회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