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 9단의 40년 라이벌
1965년, 다다미가 깔려있는 넓은 도장의 중앙에 까까머리 두 소년이 바둑판을 가운데 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 대국을 벌이고 있다.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을 한 채 숨을 죽이며 관전을 하는 중이다.
어리고 앳된 모습의 소년은 한국의 바둑 신동 조치훈(9세) 소년. 그리고 마주앉아 바둑대결을 벌이는 소년은 홋카이도(北海島)의 바둑 신동으로 기타니 도장의 내제자로 새로 입문하게 된 고바야시 고이치 소년((小林光一, 13세)이다.
장소는 도쿄 인근 야쓰야(四谷)의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바둑도장. 치수는 입문 선배인 조치훈의 백으로 고바야시의 흑 두 점 치수. 생애 최초로 첫 번째 시험대국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50년 라이벌 대결의 서막이 서서히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의 대결은 싱겁게도 2점 치수로 조치훈의 승리. 홋카이도 천재소년의 기를 꺾어버린 것이다. 이 대국이 고바야시와 조9단의 첫 대면이자 필생의 라이벌 전의 시작이었다.
-고바야시의 절치부심
첫 번째의 만남에서 자기보다 어린 한국의 소년 조치훈에게 치욕의 패배를 당한 고바야시는 눈물을 삼키며 각고의 노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설욕의 기회를 노리게 된다. 그것은 먼저 프로로 입단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의 노력형 천재답게 바로 그 다음해에 조치훈을 제치고 당당히 먼저 입단하게 된다. 뺏기고 빼앗는 선두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기타니 도장의 규칙은 먼저 입단한 동문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사범이 되어 동문들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된다. 그러므로 문하생은 사범을 선생님 대하듯 깍듯이 해야 한다. 조치훈은 그때 당시를 회고하며 고바야시를 사범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싫었다고 말한다. 너무나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창피하고 굴욕적인 시절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어쩌면 그 사건이 그의 분발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일년 반 뒤 그도 입단하게 되고 치욕의 시간을 벗어나게 된다.
다시 또 동등한 입장에서 선두 다툼이 이루어지고 아직도 어렸던 그들은 도장에서 동고동락하며 최고 타이틀을 향한 여정은 계속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조치훈은 선두로 나서게 되며 일본의 최고 메이저 타이틀인 명인 위를 획득하게 된다.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내 최고수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고바야시 역시 곧 이어 메이저 타이틀인 기성전에서 우승하며 선두다툼의 끊임없는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최정상을 달리던 조 9단이 일본 바둑황제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대삼관(大三冠) 메이저 대회인 명인, 혼인보, 기성을 같은 해에 동시에 획득함으로써 일본바둑계의 천하통일을 이룩하는 대업을 이루게 된다.
-조치훈의 휠체어 대국과 고바야시의 반전
1986년은 영광과 비탄의 시간이 반복된 시절이었다. 정초의 추운바람이 불던 날, 집을 나서던
조치훈에게 날벼락 같은 교통사고가 닥친다. 말 그대로 온몸이 만신창이 되어 전치 7개월의 치료와 대수술을 요하는 사건이었다. 최고의 기량으로 전성기를 이루었던 조치훈에게는 불운의 대사고였다.
당시 최고의 타이틀인 기성전 결승 7번기를 열흘 앞두고 있었다. 상대는 영원한 숙적 고바야시 기성. 교통사고 후 의사의 만류와 부서진 다리의 수술까지 미루고 결전을 벌인 대국이 바로 일본 바둑사의 일획을 그은 휠체어 결전이다.
고바야시 9단으로서는 이겨도 기분이 좋지 않고 져도 기분이 안 좋은 상황이다. 그러나 승부의 세계는 비정한 것. 고바야시는 비장한 결의를 다짐하게 되고 삭발을 하며 대국에 임하게 된다.
결과는 고바야시 기성의 승리로 결말을 맺는다. 휠체어 대국 이후 조9단은 무관으로 전락하게 되며 철저하게 7. 8년간 침체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상대의 위기는 나의 기회
그 이후 고바야시(63)는 최고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기사로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게 되며 일본인 대기록인 기성전 8회 우승, 명인전 7회 우승, 천원전 5회 우승, 십단전 5회 우승, 최고의 명예와 상금이 걸린 국제대회 후지쓰배 3회 우승 등 통산 타이틀 획득 수 59회로 일본인 최고의 대기록을 세웠다.
그동안 기타니 9단의 딸인 고, 기타니 레이꼬(小林禮子) 6단과 결혼하여 슬하에 여류기사 고바야시 이즈미 3단이 있다. 이즈미 3단은 일본기원 소속 장쉬 9단과 결혼하여 기타니 가문의 후계자로 바둑 일가를 이루고 있다.
그는 고바야시류라는 새로운 바둑 기풍을 창안하였고 일명 지하철 바둑으로, 철저하게 실리 위주로 냉정하고 비정할 정도로 상대의 집을 파고드는 바둑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또 바둑은 한집만 남아도 이길 수 있다는 어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일본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일본바둑의 간판스타이기도 하다.
choi1581@daum.net
풍운재 최환정(Charles Choi)
미국바둑협회(AGA) 공인 7단
워싱턴바둑동호인회 회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