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기를 가슴위에 안고 양손에 가방을 든 이 젊은 남자는 철롯길을 조심스럽게 무거운 발자국을 하나씩 옮긴다. 가끔 표적 없는 먼 곳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그 옆으로 젊은 여인이 댓살 쯤 되는 계집아이의 손을 놓칠세라 꼭 잡고 다른 한손에 비닐봉지에 싼 것을 들고 땅과 앞을 번갈아 보며 타박타박 걷는다. 가끔 남자의 표정을 훔쳐본다. 그 여인은 그 남자를 믿고 따라가는 표정이다.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을 반기는 듯이 화사하게 핀 철로가의 코스모스에게 인사 받을 겨를도 없다. 그들은 이 철로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어린계집아이는 철없이 때때로 짜증을 부리면서도 마치 무슨 교훈이라도 받은 듯이, 결심이라도 한 듯이 뾰족한 그 예쁜 입을 하고 불평을 참는 표정이다.
곧 해가 질텐데, 이들이 어디서 밤을 샐 것인가. 저 언덕에서 잠시 주저하던 해마저도 갈 길을 가야한다는 듯이 약간의 빛을 남겨둔 채 가버린다. 밤하늘의 별들에게 그들을 맡기고 가버린다. 그들이 오늘밤을 어디서 어떻게 지나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저녁 뉴스가 꺼지면 우리는 곧 그들을 잊어버릴 것이다. 다시 그들을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이곳저것을 떠도는 난민들 얘기다.
인류는 처음부터 나그네의 숙명을 갖고 왔다. 인류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태어나 여기저기 먹을 것과 살 곳을 찾아 긴 여행을 해 왔다. 나의 유전자를 조사해보니 선조가 아프리카에서 중동을 거쳐 인도, 남지나를 지나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왔다고 한다. 구약성경의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방랑을 하여 주님이 가르친 곳으로 가야 했고 예수도 요셉과 마리아를 따라 잠시 이집트로 피해 갔어야 했다.
미국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큰 대양을 건너와 이룬 나라다. 우리 한민족도 매일 저녁 뉴스에서 보는 중동의 피난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역경을 겪어 왔다. 그것이 마치 어제일 같다. 1950년 7월 3일, 북한의 남침 일주일 후 서울에 살던 맏형의 가족들이 새벽녘에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아무 표정 없이 부산 우리 집 문을 들어설 때 13살 된 어린 나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전쟁이 일어난 후 종무소식이었던 그들을 맞는 순간의 아버지와 어머니 심정을 내가 어찌 이해 할 수 있었겠나. 어머니의 눈시울은 하루 종일 젖어있었다.
며칠이 지난 하루 16살의 소년과 나와 동갑인 13살 되는 사내아이가 우리 아버지를 찾아와 상가에 위치한 우리 집 앞에 좌판을 차려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아야하겠다며 허락을 청했다. 그들은 개성에서 피난 왔다고 했다. 아버지가 서슴없이 허락 하시면서 잠은 어디서 자느냐고 물으니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하였다. 아버지는 우리 집 가게에서 자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 뒤에 앉아서 눈물만 흘리셨다. 다행히 그들은 환도 후에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었다.
시리아 난민들이 생명을 걸고 유럽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 6.25와 1.4후퇴 때 내가 살던 부산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은 내 맘을 뭉클하게 한다. 지난 주일예배 때 독일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우리교회의 전직 부목사는 설교를 통해 자기는 중동에서 온 피난민들의 정착을 최선을 다해 돕겠다며 기쁨과 기대를 표했다. 그러면서 주님이 주신 이 기회를 감사한다는 말도 했다. 나그네 된 우리가 다른 나그네들을 돕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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