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과 출산, 육아를 경험해보니 이것은 인간의 영역이라기보단 짐승의 영역에 가까운 것 같다. 우선 모든 감각기관이 날짐승의 그것처럼 발달해서 아기의 안전과 관련된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령 출산 직후엔 시끄러운 세탁기가 돌아가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면서도 방에서 자고 있는 아기의 작은 칭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는데 당시 방문 앞 소파에서도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던 이모님은 내가 벌거벗은 몸으로 아기 이름을 외치며 뛰어나오는 걸 보고 놀람과 경악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이 다른 인간적인 욕구보다 우선했다. 그러니까 만약 이것이 인간의 영역이라면, 커피, 초콜릿, 술, 밀가루 음식 등 각종 인간의 기호식품과는 결별한 채 7개월째 아스파라거스와 피망, 아보카도 같은, 평생 쳐다보지도 않던 야채를 모유수유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한접시씩 먹을 수 있을 리 없다. 나는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새끼한테 온전한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먹었다. 무엇보다 모유수유를 하기 위해 반쯤 헐벗은 채로 아기를 안고 침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는 내 모습은 영락없이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나오는 오랑우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기가 좀 더 커서 여유가 생기면 다시 주변에 둔감하고 미식을 탐하며 겉모습에 신경쓰는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사실 나는 이런 내 모습이 싫지만은 않다. 지난 삼십년간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머리굴리면서 살았을 때는 생활에 대한 욕심에 매몰되어 정말 중요한 삶의 문제들에 대해 잊고 살 때가 많았다. 입을 게 있어도 무엇을 입을 지가 고민이었고, 먹을 게 있어도 더 새롭고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온전하게 아이의 양육에 집중하게 되니 나와 내 가족이 건강하고 먹고, 행복하게 하루를 보내는데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배부르게 먹고, 서로의 존재에 집중하고 살을 맞대고 애정을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누군가의 자식일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들인데,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겪게 되는 걸 보니 아이를 낳는다는 건 여러모로 멋진 경험인 것 같다. 책임감과 육아노동으로 숨막히는 하루를 보내고 이러다가 ‘내’가 소멸되면 어쩌나를 고민하다가도 몰랐던 것들을 배우고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는 게 보람차다. 한 마리 아기 사자처럼 울고 있는 딸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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