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라스모어라는 동네는 언덕길이 많이 있다. 아침 운동을 하기위해 걸어가는 길도 언덕길이다. 이 동네로 이사온 지 약 오년이 지났는데 나는 이 언덕길을 수없이 오르고 내리고 했다. 언덕길들은 정말 산책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의 통계가 나왔는데 야트막한 언덕 위에 사는 사람들이 비교적 장수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언덕 길을 걷는 것은 심장을 튼튼하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내 윗층에 사는 케이티라는 여자는 지금 팔십대 중반인데 언덕길을 올라갈 때마다 "굿퍼 유어하트"라고 웃으며 말하곤 한다.
내가 또 언덕길을 좋아하는 이유의 하나는 그 언덕길은 사시사철 계절이 변화할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때문이다. 봄이면 제일 먼저 하얀 배꽃들과 황홀한 자주색 목련꽃들과 키 작은 노랑과 흰색의 구근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여름이면 짙푸른 초록색의 숲들을, 가을이면 온갖 색들의 단풍으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이제는 어느듯 낙엽들이 다 길위에 떨어져 이리저리 굴러다니던게 어제 같은데 벌써 가을이 지나고 겨울의 초입에 와있다. 나무들은 곧 앙상한 가지들만 남겨놓고 또 다시 올 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들이 사는 모습도 비슷하다. 어느 유행가에 "내 청춘을 돌려다오"라는 가사가 있다.우리도 한때는 찬란한 젊음이 있었는데 언제 여기까지 와서 인생의 겨울의 한복판에 서있게 되었는가.
마음은 쓸쓸해도 그렇다고 서럽지는 않다. 젊음은 젊음대로의 즐거움이 있고 늙어서는 늙은대로의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몇년 전 타계하신 소설가 박경리 선생도 "아! 늙음이 이렇게도 편안한 것이거늘!이라고 어떤 글에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 한평생을 잘 산 사람들은 늙음이 편안하다. 이제는 지지고 볶고 하지 않아도 삶은 흘러가고, 한줄기 따뜻한 햇볕과 바람에 흔들리는 장미꽃 한송이에도 그 아름다움에 감사함을 느끼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것도,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가며 생각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이 평범한 사실조차 감사함으로 다가오는 삶의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일까.
아무튼 이제 젊은날의 정열도 사랑의 아픔도, 자식들 때문에 아우다웅하던 모든 것들로 부터 해방되어서 우리들은 편안하다. 언덕길을 걸어가며 나는 생각한다. ‘오늘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살까?’ 하고.
우선 친구들을 만나서 맛있는 점심을 먹을까? 좋은 영화 한편을 볼까? 손주들을 찾아가서 함께 놀까? 아니면 글을 쓸까?여러가지 상념들이 머리를 스쳐가는데 문득 크리스마스가 며칠 있으면 다가온다는 생각이 났다. 갑자기 주변에 아픈 사람들이 생각나면서 조그만 일이라도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는 기특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요즘 몸이 불편해 매일 하던 운동을 못나오시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나는 그분이 좋아하시는 생선 초밥을 해드리기 위해 친구와 가게로 달려갔으나 그곳에 내가 찾는 생선은 없었다. 맥이 빠졌으나 다른 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날은 마침 나도 운전을 할 수 없는 날이었다. 아침에 안과를 갔기 때문에 눈이 부셔서 멀리는 갈 수 없었다.
요즘 나는 치과도 자주 가고, 안과에도 가고 해서 은근히 짜증이 나는 상태다. 나는 여직껏 건강하게 산 탓에 아프면 참지를 못하고 남이 아픈 사정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며칠전 이 두개를 크라운을 하기 위해 입을 있는대로 벌리고 장장 두시간 반을 버티는데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간 머리가 돌 것 같았다. 이왕 왔으니까 스케일을 하라는 것을 신경질을 내며 거절하고 돌아왔다.
운전을 하고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다행히 아직 건강하고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나를 수퍼우먼으로 치부하고 있다. 아직은 내맘대로 운전하고 내마음대로 돌아다니고,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즉각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여건이 있다.
그러나 생로병사는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이다. 화무십일홍이라고 아무도 열흘 이상 붉게 피어있는 꽃은 없다.이것이 인간의 슬픔이며 묘미이기도 하다. "우리 같이 늙어서 잘 사는 사람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주위에 친구들이 곧잘 자랑하는 소리다.
아직 늙었지만 병들지 않았고, 자식들이 모두 편안하고, 하루 세끼 먹을 밥이 있고, 가끔은 귀찮지만 잔소리하는 남편도 있고, 우선 가까이 사는 친구들도 건강해서 수시로 만나고, 영적으로도 활발해서 성경 공부도 심심찮게 하니 이만하면 살만하지 않은가. 나는 오늘도 언덕길을 오가며 입속으로 가만히 바윗고개를 불러본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그러면 어느새 내 마음은 고향의 그 언덕길,과수원의 하얀 배 밭으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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