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대선이 있는 해에는 빠짐없이 대선 후보 간에 토론이 벌어진다. 그러나 후보가 여럿이다 보니 장시간에 걸쳐 후보가 가진 정치 철학이나 정책을 듣거나 각종 현안에 대한 후보들 간의 깊이 있는 토론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사회자가 던진 질문을 몇 분 안에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다. 토론이라기보다는 구호에 가깝다. ‘소리 조각’이란 뜻의 ‘사운드 바이트’(sound bite)란 말이 잘 어울린다.
정치인들의 토론이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미 역사상 가장 뛰어난 후보들 간의 토론으로 꼽히는 것은 1858년 일리노이 연방 상원의원 자리를 놓고 벌어진 에이브러험 링컨과 스티븐 더글러스 간의 토론이다. 이들은 그해 8월부터 10월까지 일리노이의 7개 도시에서 일곱 차례 토론을 벌였다. 토론의 형식은 한 후보가 60분간 연설을 하고 다른 후보가 90분간 반론을 겸한 연설을 하면 첫 후보가 다시 30분간 재반론을 하는 방식이었다. 한 회 토론에서 연설 시간만 장장 3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런 충분한 시간 덕분에 이들은 ‘독립 선언서’에 나타난 미국의 건국이념과 연방 정부와 주 정부, 그리고 국민의 권리, 북위 36도30분 북쪽에서는 노예제를 금지하기로 한 1820년의 ‘미주리 타협’, 이를 폐지한 ‘캔사스 네브라스카 법’, 중서부 지역에서의 노예제를 금지한 1787년의 ‘북서부 법령’, 자유주로 이동한 노예의 자유인 신청 자격을 거부한 연방 대법원의 드레드 스캇 판결 등 당시 미국의 최대 현안이었던 노예제에 대한 전반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가 가능했다.
그 해 선거에서 링컨은 결국 더글러스에게 지고 말았지만 이 때 보여준 그의 탁월한 연설과 토론 능력은 모든 이의 주목을 받았고 이것이 결국 1860년 그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첫 번째 공화당 대통령이 되는 밑거름이 되며 이들 간의 논쟁은 훗날 책으로 나와 정치인 토론의 귀감이 된다. 지금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열리고 있는 토론회 형식도 여기서 본 딴 것이며 미국의 전통이 된 대선 토론회도 그 기원은 ‘링컨-더글러스 논쟁’이다.
그러나 그 후 160년이 지난 지금 미국 토론회의 수준은 그 때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아마 그 때 형식으로 후보자들의 정견을 장시간 방영한다면 시청자들은 대부분 TV 채널을 딴 곳으로 돌리거나 잠을 잘 것이다. 링컨-더글러스 논쟁 때는 지금보다 교통수단이 훨씬 열악했는데도 수 천 명이 참석해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했다. 유권자들의 수준이 옛날보다 떨어졌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추락한 유권자들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올해 공화당 대선 경쟁이다. 신출내기 정치인 도널드 트럼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 이민, 반 여성, 반 장애인, 반 소수계, 반 무역, 반 회교도 등 미국의 기본적인 가치에 반하는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데도 현재 지지율 1위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이것이 표로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겠으나 30%에 달하는 공화당원들이 이런 인간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과 공화당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링컨은 1863년 남북전쟁 최대 격전지인 게티스버그에서 노예 해방과 미합중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들 추모 연설을 하면서 “87년 전 우리 조상들은 이 대륙에 자유 속에 잉태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믿음에 헌정된 새 나라를 세웠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 마지막 한줌까지 헌신을 바쳤고, 우리는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가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맞도록,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굳게 결의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 후 불과 2년도 안 돼 링컨 자신도 흉탄에 맞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 링컨이 지금 이 모양으로 추락한 공화당의 모습을 보면 뭐라 할 것인가. 링컨의 통곡이 무덤 속에서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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