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흥사단 본부에 기증했던 피아노가 새롭게 떠오른다. 6.25전쟁 후 미주의 선배들이 보내준 피아노를 오랜 세월 여러 사람이 치다보니, 음반 여러 개가 깨진 상태였다. 나는 1983년 제70차 흥사단 연차대회를 기해 피아노를 기증했다.
1948년 흥사단운동이 미주에서 서울로 옮겨지면서 미주의 선배들이 을지로 입구 대성빌딩을 마련해주고 모든 비품을 함께 보내줬다. 이 때 도움을 주신 분 가운데 하나가 한시대(韓始大) 선생이다. 그는 유명한 ‘금요 개척자 강좌’를 개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셨다. 이 공간은 자유와 정의, 번영을 위한 정신적인 힘을 불어넣어준 곳이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한 달 안에 도산선생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당시 2만5,000달러를 들고 상해로 떠나셨다.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이를위한 재원 대부분이 도산선생의 주변을 통해 조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3년경에 임시정부에서 독립공채를 발행했다. 1대25. IMF직후인 1998년 1월 흥사단 미주위원부에서 보유하던 독립공채 상환금액에 적용된 환율이다. 이미 해방 후 3차례에 걸쳐 독립공채 상환을 공고했지만, 실제 상환액은 몇 건에 얼마 되지 않았고 그러다가 시효가 만료되었다. 그 당시 독립자금이 모일 수 있는 곳은 본국의 지주계급과 미주 한인들 밖에 없었다. 한국정부는 독립공채 상환에 이런 상황을 감안해야 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던 시대, 선조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을 거쳐 남가주 지역에 유입된 한인은 8,000여명이었다. 농장의 하루벌이가 2달러 남짓이던 시절 그 많은 독립운동자금이 일시에 어떻게 해서 마련되었을까. 한시대 선생 같은 큰 손들이 계셨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본다.
1889년생인 한시대 선생은 1903년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와 사탕무 농장을 경영하며 사업가로서 성공한다. 1916년부터 아버지를 도와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하며 민족교육에 힘썼다.
일생을 사업가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분이다. 해방 후에는 조국으로 돌아가 활동하시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농장운영과 흥사단 이사장 등으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1981년 세상을 떠나셨다. 한국 정부는 선생의 이런 공을 기려 지난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한국정부에선 이달의 독립유공자로 한시대 선생을 선정하고, 천안 독립기념관에 한 달간 유작전을 열고 있다. 또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한국정부 후원으로 오늘 선생을 기리는 세미나를 갖는다. 너무 늦어선생에게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한국정부는 노무현 정부 이전까지 미주지역에 소홀했다. 도산선생 같은 분도 그 이후부터 혜택을 받았을 정도였다. 안에서 잃어버린 나라를 밖에서 나라를 찾아준 이들이 바로 미주 한인 선조들이다.
거북이 등가죽 같은 손바닥으로 일궈준 조국이다. 급변하는 시대, 바람 잘날 없는 조국을 위해 우리들,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은 어떤 역할을 해나갈까. 3월은 보훈의 달이다.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여러 단체가 연합해서 뜻 깊은 3.1절 기념행사를 갖는다. 3월10일은 도산선생의 78주기 서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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