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두 주간의 러시아 여행이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이유는 어려서부터 그들의 언어와 이름 등의 이질적인 발음이 나를 매혹하여 생겨난 러시아의 문학과 예술, 음악과 발레에 끌렸던 영향일 것이다.
도스토예브스키와 같은 시대의 화가 바실리 레로프(Vasily Perov)의 도스토예브스키 초상화를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Tretyakov )화랑에서 보았을 때 가슴이 설레었다. 그의 모든 책에 저자소개와 함께 실리는 눈에 익은 이 초상화를 보자 오래잊고 있던 그의 작품의 인물들이 순서없이 머리 속에 떠 올랐다. 그 소설을 읽을 때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연결되는 교감에서 오는 설레임이라 싶다.
또한 상 페테르부르그에 있는 헤미타지 미술관(Hermitage Museum)에서 내가 무조건 좋아하는 네덜란드화가 고호와 렘브란트의 작품을만났을 때에도 나는 전율했다. 특히,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에서 느낀 환희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예수님이 들려 주신 ‘돌아온 탕자’ 예화를 그린 이 그림은 가로 82인치 세로 105인치 정도로 보통 가정 집의 벽 한쪽을 다 차지할 만 한 큰 그림이다. 하버드와 예일대학 신학교수로 존경을 받던 캐톨릭 사제 헨리 나우엔(Henri Nouwen )역시 이 그림에 매혹되어, 같은 이름의 책을 저술하여 자신의 신학과 신앙 이야기를 펼쳤다. 그 책을 읽고 상당히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던 나는 이 거대한 그림을 마주할 때 감격하여 고조되는 흥분을 추스리기가 어려웠다.
‘돌아온 탕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잘 알고 있는 스토리일 것이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을 용서하는 오히려 연회를 베푸는 아버지에게 부당하다고 화를 내고 불평을 하는 큰 아들의 이야기다. 많은 경우 기독교인들은, 인간이 돌아온 탕자같은 죄인으로 회개를 해야한다며 작은 아들의 입장과 편안한 자신의 자리와 처지에 감사하지 못하고 아우의 행동을 정죄하는 큰 아들의 모습을 지적한다.
그런데, 신학자 나우엔은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무한한 긍휼과 조건없는 사랑과 영원한 용서를 하시는 창조의 하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여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작은 아들의 어깨에 거친 손을 얹은 거의 반 장님의 슬픈 모습을 한 늙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렘브란트의 신앙과 영혼을 만난 나우엔은 이 장면이야 말로 죄와 용서가 만나며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그린 명작이라 감탄한다.
이 거대한 그림 앞에 서니 어려서 부터 동화처럼 들려진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연극처럼 눈 앞에 펼쳐지면서 렘브란트가 준비한 무대와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등장하고 나우엔이 신앙고백을 서술하는 듯 하였다. 꿇어 앉아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작은 아들의 입장에서부터 허리를 구부리고 사랑하는 아들을 축복하는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가는 신앙 여정이 되어야 한다는 나우엔의 가르침이 에코가 되어 커다란 전시실에 들려 왔다.
조건없는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사회적 명예를 뒤로하고 캐나다의 정신 지체자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나우엔의 영혼을 느꼈던 러시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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