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유권자들의 선택을 기본 틀로 움직이는 정치체계이다. 유권자들은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나타내고 이에 따라 권력의 향배와 주요 국가정책의 방향이 결정된다. 유권자들이 선거를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을 내리면 ‘선거 혁명’이니 ‘위대한 선택’이니 하는 화려한 수식어가 뒤따른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선택으로 인해 국민과 국가가 나락으로 떨어진 사례들도 적지 않다. 아니, 오히려 ‘위대한 선택’보다 더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단 당선이 되고나면 권력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국민의 위임을 앞세우며 승자독식의 오만한 행태를 반복한다. 그러면서 나라는 망가지고 국민들은 고통 받는다.
제대로 된 후보를 뽑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유권자들은 항상 그런 선택을 할 만큼 합리적이지 않다. 유권자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후보자의 정책적 입장이나 공약이 아니다. 이런 것보다는 후보자들이 주는 이미지와 느낌 같은 것이 더 크게 작용한다. 개인적으로 정말 호감이 가는 후보에 대해서는 그의 정치적 입장에 자신의 생각을 맞춰가면서까지 지지를 정당화시킨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이고 사실이다. 두 후보가 맞붙었을 경우 키 큰 후보가 이길 확률이 두 배라는 조사도 있다. 외모는 물론 목소리와 인지도, 심지어 이름이 주는 호감에 따라 표를 던지기도 한다. 후보들의 정책을 꼼꼼히 비교하면서 누구 공약이 더 훌륭하고 누가 더 자질이 있는지 따지는 유권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9.11 테러 이후 국민들이 정부의 거짓에 속아 넘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역사학자 리처드 솅크먼은 유권자들이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지에 관한 책을 집필했다. ‘지혜로운 유권자’라는 믿음은 ‘신화’에 불과하고 ‘어리석은 투표’가 ‘현실’이라는 게 책의 결론이다.
과거에 비해 정보들은 넘쳐나지만 정작 이런 것들이 유권들의 합리적 판단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그리 현명하지 못하고 정치적 선동에도 너무 쉽게 휘둘린다. 마치 “교리보다 체험을 중시하는 복음주의 교회의 신도들을 닮아 있다”고 솅크먼은 지적한다.
그러니 유권자들은 ‘나쁜 정치’의 책임에서 결코 비껴갈 수 없다. 정치적 문제아들을 뽑은 것은 바로 그들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에 대한 비판은 아주 오랫동안 금기시 돼 왔다. 비난의 화살은 ‘선택 받았을 뿐인’ 정치인들에게만 집중됐다.
하지만 어쩌랴. 뽑은 이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 게 사실인 것을. 그래서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 자기 파괴적인 선택을 한 극단적인 경우들을 역사에서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UCLA 심리학과의 다니엘 오펜하임 교수는 투표행위를 그로서리 샤핑에 비유한다. 우리는 어떤 식품이 몸에 좋은지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막상 카트에 담는 것은 건강에는 별로지만 입맛을 강하게 당기는 초콜릿 칩 쿠키 같은 식품인 경우가 많다. 이성적 판단이 감정적 유혹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후보를 결정할 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책을 논하는 후보보다 나의 감정과 감성을 자극하는 언사를 던지는 후보에게 더 강하게 끌리곤 한다. 미국을 다시 한 번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하지만 아무런 구체적 알맹이가 없는 트럼프의 호언장담에 많은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이유이다.
올 대선레이스 샤핑에서 미국인들은 누구를 고르게 될까. ‘미국병’을 치유할만한 건강한 후보를 집어들 것인가, 아니면 입맛을 강하게 당기는 정크 후보를 골라 카트에 담을 것인가. 너무나도 쉬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유권자들은 아주 간혹 현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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