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백악관 앞에서 2개의 풍경도가 펼쳐졌다. ‘환영’과 ‘퇴진’이란 상극의 구호가 휘날린 집회였다. 구호가 향하는 주체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핵 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한 박 대통령을 향한 열애와 증오의 심리는 이날 미 대통령 관저 앞에서 교묘한 전선을 형성했다. 이미 몇 차례 겪은 터라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그 부조화의 생경함은 여전하다.
특히나 눈에 거슬리는 건 ‘관제성 데모’의 궁색한 열정보다 ‘박근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초라한 구호였다.
최루탄이 축제의 마당에 흩어지던 권력 과잉의 시대에 살았던 세대에게 ‘정권 퇴진’은 은근한 매력을 주는 구호다. 박근혜 정부는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뀌는데 오랜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정권 퇴진’이란 원색적 구호가 시위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정권의 실정(失政)에 대한 비판은 민주국가의 활성제다. 하지만 ‘비판’과 ‘퇴진’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국민의 민의에 의해 선출된 국가 지도자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할 때는 그에 걸 맞는 중대한 실정의 내용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퇴진 요구에 동의할 재외동포들이나 한국 국민들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설령 퇴진 요구가 받아들여진다고 치자. 노무현 정부 당시 탄핵 사태를 뛰어 넘는 무정부 상태의 대혼란이 엄습한다. 헌정질서가 중단된 대한민국 호는 혼돈에 빠지고 어디로 튈지 모른다. 감당하기 힘든 역사의 반동(反動)도 예상된다.
정권 비판에도 금도와 품격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철부지들의 마스터베이션’이란 조롱만 따를 뿐이다.
뜨악한 주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북침 핵전쟁 연습 중단하고 북미 평화협정 체결하라’는 구호도 등장했다. 북침 핵전쟁 주장은 얼마 전 종료된 한미의 키 리졸브 훈련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핵무기 탑재 무력들이 훈련에 동원됐다 해서 북침 핵전쟁 연습이라 단언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은 미국이 현재 한반도에서 북침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국내외적 여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 미국이, IS의 테러에도 속수무책인 미국이, 대통령 선거와 11월 총선에 여념이 없는 미국이 새로운 전쟁을 감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순진함은 비웃음만 살 뿐이다. 아니면 북한의 억지 주장에 동조하는 ‘종북’ 딱지를 자청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일부 진보인사들이 북한식 용어인 ‘조미 평화협정 체결’을 서슴지 않고 주장했던 것처럼.
그네들이 목을 매는 북미평화협정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지금까지 역사가 그래왔듯 북미 평화협정이 ‘북한의 평화’를 보장해주진 않는다. 그 협정이 한반도의 통일을 앞당긴다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분단을 영구화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평화를 위한 전략적 순서는 북한과 미국의 ‘협정’이 아니라 남북간의 평화부터다.
구호의 함의나 정밀성 따위는 염두에도 없는 진보의 무분별함은 보수의 관제성 집회보다 더 볼썽사납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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