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바빴던 고등학교 3학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동네 독서실에서 단짝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이 와서, 자기들은 카이스트에 원서를 넣을거라고 했다. 마감이 임박하다고 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시내에서 당장 원서를 사오셨다. 2학기 중간고사 기간에 입학 시험 날짜가 잡혀 중간고사를 하루 빼먹고 1박 2일간 대전에 다녀왔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점심 직후에 있던 시험 도중 급체로 의무실에 실려갔다. 어떻게 끝까지 마무리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버지께서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이다” 하셨던 기억이 난다.
기말고사를 준비하던 어느 토요일, 전화로 최종 합격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대전에서 다음 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어찌 어찌하다 보스톤에서 신혼을 보내고, 첫 아이를 낳고, 첫 직장을 다니고, 첫 집을 사고, 또 우연히 캘리포니아로 오게 되었고, 둘째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 모든 일들은 내가 진작부터 계획했던 일이 아니었다. 내가 그 당시 어렴풋이 상상했던 일은 생명 과학을 공부하는 정도였을까?
“엄마, 박사가 뭐에요?” 큰 아이가 엄마 아빠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묻는다.
“음.. ㅇㅇ이는 지금 일학년이지? 초등학교는 5학년까지고, 6학년부터 중학교에 가고 9학년에는 고등학교. 그리고 12학년을 마치면 어디를 가지?” “대학교요.” “어떤 사람들은 대학교를 마치고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석사도 하고 박사도 해. 박사라는 것은 뭘 많이 좋아해서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었다는 뜻이야. 대학교를 마치고도 몇 년 씩, 그러고도 공부가 너무 좋으면 박사 후 연구원을 또 몇 년 하지.” 한참을 듣고 있던 아이가 한숨을 푹 쉬며, “아휴... 나는 아직 일학년! 앞으로 백 만 년은 더 있어야 되는거네요” 한다. 내 아이는 아직 모른다. 자기 앞에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는지. 얼마나 뜻하지 않은 수 많은 일들이 일어날지.
내가 가장 좋아했던 빨강 머리 앤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전 그 어느 때보다 꿈에 부풀어 있어요. 단지 꿈의 방향이 바뀐 것뿐이예요. ...(중략). 이제 전 길 모퉁이에 이르렀어요. 그 모퉁이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좋은 것이 있다고 믿을 거예요. 길 모퉁이는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요, 아주머니.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 궁금하거든요.”
<
황선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