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늦은 저녁시간, 클래식 연주회에 낮잠을 든든히 잔 첫째 아이와 큰맘을 먹고 다녀왔다. 오랜 공연을 잘 참고 감상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마지 못해 몸을 배배꼬며 앉아있는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무대 정면 앞쪽에 우리가 앉은 두 줄 앞으로 부모와 온 남매가 있었는데, 공연 시작 전부터 끝날 때까지 두 시간 내내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번쩍이는 화면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하더니 나중에는 배터리까지 갈아 끼우고 휴대폰을 치켜들고 하는 것이었다.
그 부모는 어떤 생각으로 그 아이들을 데려다 무대 정면 중앙에 앉혀 둔 것일까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공연에 관심이 없었다면 차라리 바깥 벤치에 앉아 있거나, 한쪽 끝 혹은 맨 뒷 자리라도 앉아 있었다면 좀 낫지 않았을까. 내가 바로 뒷자리였으면 분명 한 소리를 하고 말았을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줄 뒤에 앉는 바람에 아무말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행동은 오랜 기간 연습을 하고 무대 위에서 혼신을 다하는 연주자들에게는 무례한 행동이었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민폐를 끼친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무(어른)도 그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지 못했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나를 비롯해 주위에 있던 어른들은 그 아이들의 부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아이들이 잘못한 행동을 했다면, 부모로서 내 아이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나는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는 일은 하고도 후회, 안하고도 후회가 되기 쉽다.
나는 최근에 읽은 “가정 교육의 붕괴(the collapse of parenting, 제목을 내 마음대로 의역하였다)”라는 책의 내용에 공감한다. 지난 27년동안 소아과 의사로서 저자는, 미국에서만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무례한 태도와 소아 비만, 약물 의존 등 여러가지 문제점들의 근원이 부모가 아이들을 올바로 훈육하지 못하고 너무 많은 결정/선택권을 주며 ‘어른 취급’을 하는 데에 있다고 다양한 사례와 자료들로 설명한다. 간단한 예로, 병원에서 부모가 토들러 아이에게 “의사 선생님이 네 귀를 좀 들여다 봐도 될까?” 식으로 물어보는 순간, 대부분 쉽게 끝날 진료는 눈물 콧물 바람의 전쟁터로 바뀐다. 이럴 때는 그냥 어른인 부모가 “의사 선생님이 네 귀를 들여다볼 거다”라고 결정을 내리고 통보를 해야지,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황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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