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 한국인들의 감성에는 참 잘 들어맞는 남다른 사이다. 생면부지라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우리’라는 유대감을 공유하게 되니 말이다.
고국을 떠나 온 한인 이민자들에게는 더 각별하다. 사람이 그립고 정이 그립다보니 마음을 함께 하고 힘들 때는 밀어주고 끌어주는 이웃사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 미국에는 초중고, 대학교도 모자라 대학원, 유치원 동문회들도 꽤나 많다.
내 경우는 활발하지 못한 성격에다 바쁜 이민생활을 핑계로 미국에 온 20여년 동안 어느 동문회이건 발걸음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어쩐지는 몰라도 재작년에야 자의반 타의반 고교 동문회에 나가게 됐다. 솔직히 첫 동문회 참석 소감은 약간은 불편하고 왠지 무덤덤했다. 게다가 30여년 만에 만난 동기 녀석은 흰머리에 주름살 가득, 왜 그렇게 폭삭 늙었는지 세월의 무상함만 느꼈었다.
하지만 몇 달 전 내가 동창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아니 소중하게 느끼게 된 ‘사건’이 터졌다. 한 동기가 새벽에 깡통 밴을 운전하고 일을 가던 중 차량이 전복된 것이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한쪽 팔이 절단되는 참변을 당했다. 혈혈단신 미국에서 외롭게 살고 있던 동기에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슬픔에 빠져있을 틈도 없이 당장 사고 수습이 발등의 불이었다. 헬기로 대학병원에 이송해야 할 정도의 워낙 큰 교통사고인지라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던 순간이었다.
동문회장이 카톡 그룹방에 비보를 알리자마자 누구랄 것도 없이 발 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몇 시간 만에 병실에 모인 동문들은 각자의 상황에 맞춰 병원, 보험, 경찰 등 분야를 나눠 일을 처리했다. 중요한 물품이 많았던 사고 트럭을 메모 한 장만으로 토잉회사 파킹랏을 샅샅이 뒤져 찾아준 선배, 보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그 트럭을 자신의 사업장에 보관하도록 자리를 내어 준 또 다른 선배, 사고 난 동문의 빈집을 찾아가 문단속을 해주는 후배도 있었다.
입원 기간 병실은 ‘작은 동문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늘 북적였다. 웨스트우드에 위치한 병원이었는데 가깝게는 LA, 사우스베이, 오렌지카운티에서 멀리는 랜초쿠카몽가, 애리조나에서도 찾아와 사고 난 동기에게 힘을 실어주고 위로했다. 퇴원 후에도 선후배의 사랑은 이어졌다. 몇 일간 차를 몰고 통원치료를 함께 다니는가 하면 손수 식사를 해결하기 힘들까 먹거리를 실어 날랐다. 자신들의 시간과 정성, 노력을 기꺼이 동창을 위해 희생한 것이다. 친지라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어느 덧 사고가 난 지도 두 달. 그 동기는 비록 한쪽 팔은 잃었지만 제2의 인생을 살겠다는 삶의 의지는 더 단단해진 것 같다. 불편한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을 뽑아 원래 하던 컨트랙터 로 복귀하고 맡아놓았던 공사도 재개했다.
그는 “하필이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나 하고 실의에 빠진 적도 있지만 평생 잊지 못할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준 동문들을 생각하니 큰 힘이 됐다”며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창’이란 단어가 언제나 반가울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에게 뒷통수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리는 세상인데다 ‘학연타파’라는 단어는 씁쓸하기까지 하다. 물색없이 자랑 질이나 하는 동문 때문에 ‘바보처럼 살았나’라는 자괴감에 초라해질 수도 있다.
각자의 터전에서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동창’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서로의 갭을 줄이고 허심탄회한 관계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동창은 어렵고 외로운 이민생활에서 마음을 열어놓고 서로의 아픔을 감싸 안아주는 인생의 동반자가 충분히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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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광 특집2부장·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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