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독일은 유럽 최강국이지만 근대 초기만 해도 여러 나라로 갈라지고 프랑스와 영국에 비해 낙후된 지역이었다. 독일 중부에 있는 소도시 바이마르는 이들 나라 중에서 가장 먼저 서유럽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곳이다. 독일 계몽 철학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문호 괴테와 실러의 고향이었고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 등 예술가들이 활동하던 곳이었으며 발터 그로피우스가 세계적으로 이름난 바우하우스 디자인 학파를 세운 곳이다. 1918년 독일 제국이 1차 대전에서 참패해 망한 뒤에는 독일 역사상 처음 민주 정부가 수립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 날 사람들이 바이마르를 기억하는 것은 이런 업적이 아니라 14년이란 짧은 나이로 요절한 바이마르 공화국 때문이다. 독일이 1차 대전에서 진 것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아니라 카이저와 독일 군부의 오판 때문이었음에도 독일 국민들은 바이마르에 그 책임을 돌렸다. 바이마르 정부가 가혹한 배상을 요구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배상금을 물기 위해 화폐를 마구 찍어내다 보니 하룻저녁 장을 보기 위해 수레로 돈을 날라야 하는 초인플레와 1929년 미국 발 주가 폭락과 함께 시작된 대공황이 독일을 덮쳤다. 도탄에 빠진 독일 국민들은 자신을 이 위기에서 구해줄 구세주를 찾았고 이 모든 사태는 돈줄을 쥔 수전노이자 기생충인 유대인 때문이며 이들을 제거해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아돌프 히틀러를 택했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수권법’을 통과시켜 전권을 장악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제2차 대전을 일으켜 수천만 명을 살해하고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괴테와 베토벤을 낳은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택했다는 것은 배고프고 분노에 찬 국민들은 어떤 일도 벌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미국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과 함께 시작된 미국 발 대불황은 공식적으로는 2년 만에 끝났지만 그 여파는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단적인 증거가 160여년의 역사를 가진 미 양대 정당 중 하나인 공화당이 깡통 중의 깡통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 후보로 택한 것이다.
트럼프는 미국이 중병에 걸린 원인을 멕시코 불법 체류자 탓으로 돌리고 당선되면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을 것을 공언하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 외치고 있다. 멕시칸을 유대인, 장벽을 강제 수용소로 바꿔놓으면 히틀러와 매우 유사하다.
미국의 장기 불황과 멕시코 경제의 성장, 신생아 감소 등으로 사실상 멕시코 밀입국자 문제는 사라졌으며 농장 노동과 청소, 건축 노동 등 멕시코 인들이 하는 일은 미국인들은 돈을 줘도 하지 않으려는 일이라는 사실은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대불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수입이 준데다 앞으로의 전망도 밝지 않은 자신의 신세를 망친 탓을 할 희생양이 필요할 뿐이다. 어쩌면 트럼프는 “사람들은 작은 거짓말은 잘 믿지 않지만 큰 거짓말은 잘 믿는다. 거짓말도 자꾸 하면 진실처럼 들린다”는 히틀러의 대중 선동술을 몰래 익히고 있는가 보다.
트럼프는 당내 후보 경선이 끝나자마자 종전 입장을 180도 바꿔 다른 후보처럼 정치 자금 후원을 받겠으며 최저 임금 인상과 증세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거기다 미국은 돈을 찍어내면 되기 때문에 국가 부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하긴 바이마르 공화국이 돈을 마구 찍어내 초인플레가 발생, 분노한 국민들이 히틀러를 택한 선례가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하면 자기에게 유리하다는 계산을 했는지 모른다.
공화당 유권자들의 트럼프 선택은 독일과 미국을 막론하고 분노한 국민들은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음을 확인시켜줬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국에서 그런 국민은 소수다. 나머지 국민들이 할 일은 11월 본선에서 트럼프와 그런 후보를 선택한 정당의 말로가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미국은 바이마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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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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