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길을 떠나는 자는 그리움때문이다. 젊었을 땐 수려한 풍광에 홀려 떠났다. 그러나 황혼녘엔 사람이 그리워 떠난다. 좋은 인연들의 눈빛이 보고싶고, 목소리가 듣고싶어 찾아간다. 평생 나눈 정이 고마와 등을 감싸주기위해 떠난다.
뉴욕의 L형님 내외가 손수 차를 몰고 이곳 샌프란시스코까지 오셨다. 77세 희수 나이에 대륙을 횡단, 불과 1주일 만에 오셨다. 젊은이들도 엄두를 못낼 거리를 보고픈 마음에 단숨에 달려왔다고 하셨다.
“인연이 있으면 천리 밖에서도 만날수 있으나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만날 수 없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그런데 더 좋은 인연은 눈앞에서 마주보고 시린 등을 두 손으로 다둑여주는 것이리라.
평생 베풀며 살아오신 형님은 속깊은 인연이 많으시다. 며칠 묵을 수 있는 형제같은 인연들을 세어보니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이고 곳곳에 흩어져살아 대륙 횡단 여정이 즐거웠다고 하신다.
그런데 하루 밤을 잘 주무시고 난 다음날, 길을 떠난 절박한 이유를 들었다. 평소 건강하셨는데 작년부터 갑자기 백혈구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혈청치료를 앞두고 길을 떠나기로 결심하셨다. 그나마 몸이 성할 때 그리운 사람들을 한사람씩 만나 “꼭 안아주고”싶어 오셨다는 것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병은 그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했다.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 모두에게 공평하고 엄격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좀더 적극적으로 죽음을 맞을 생각을 하셨다는 것이다. 웰 리빙에서 웰 다잉(well-dying)의 전환이라고 하셨다.
“잘 살기위해 사람들의 기대, 자존심, 성공에 대한 욕망, 실패에 대한 두려움속에서 헤맸소. 그런데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고 정말 중요한 것만 남는 걸 깨달았소. 그 걸 지금 내가 표현할 길은 그들을 찾아 안아주는 것이었소.”
누군가 삶은 소풍이라고 했다. 소풍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해가 기울면 집으로 돌아가야하듯 우리도 세상 모든 소유를 내려놓은 채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 젊어선 생의 목적을 웰 리빙에 두고 적극적으로 살아왔지만 석양 무렵엔 웰 다잉을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바꾸셨다는 것이다.
이민자의 삶이 평범한 사람이 누가 있으랴? 형님 내외분과 우리도 40여년 전, 한날 한시에 미국에 들어왔다. 처가댁과 평안도 선천 동향 피난민으로 해방촌에 정착, 천막 교회를 세우고 형제처럼 동고동락하던 분이었다.
그의 부친은 고향에서 교회를 지키시다가 인민군들에게 총살당하셨다. 모친은 3남매를 데리고 가난 중에서도 오직 신앙으로만 양육하셨다. 자식들이 하루 성구 한귀를 외지 않으면 밥을 굶길 정도로 엄하셨다.
장남은 목회자가 되셨고 둘째인 그는 일찍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영민함과 성실함으로 미국에 와서도 고급 가방과 신발 제조 사업을 일으켰다. 많은 직원을 거느리고 맨하탄에 큰 직매장을 운영하셨다. 지난 40여년 동안 그는 장로로 교회와 사업체를 통해 많은 어려운 교역자들과 이민자들을 도왔다. 번돈으로 세계 곳곳에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북한에도 고아원을 세웠다.
그러나 정작 본인는 외동 아들내외와 검소하게 살아오셨다. 그러던 중 본인의 병을 알게 된 후, 아들에게 은퇴목회자이신 장인을 모시도록 권한 뒤 먼길을 떠나신 것이다. 두어달 여정이 끝나면 평생 도와왔던 중국선교지에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하셨다. 우리 부부를 힘껏 안아주고 떠나셨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방문객, 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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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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