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무렵 리치몬드 만 저만치 연 보라빛 구름이 하늘가를따라 장막을 이루며 육지를 향해 다가든다. 바람은 마음대로구름을 흐트려 놓아 자유분방한 붓터치를 남기고 산 라파엘브릿지의 유연한 곡선 아래로는 은빛 바다가 너울거린다.
그위로 몇개의 바위섬이 물결을모으며 고요히 떠있고 내륙으로부터 뻗어나간 송유관에 옆구리를 대고 커다란 유조선이벌써 배 전체에 불을 대낮처럼밝힌채 정박해 있다.
해질녁 이 대지가 머금는 이보라빛 공기가 나는 좋다. 하루중 이맘때의 빛깔은 어쩐지 내나이에 어울리는 넉넉함과 안온함을 품고있는 듯하다. 아침부터 동분서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하루를 보내고 이맘때쯤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각각의 일터를 벗어나 집으로간다.
해가 뜨고 일을 하고 해가지고 잠들기까지 하루의 흐름은 마치 일생의 축소판 같다.
해질녁 집으로 가는 길, 이것이머지않아 내 나이가 당도할 시간일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치열한 삶터에서 한 발 물러나보다 덜 실수하고 조금은 현명해질 때, 그러나 점차 눈과 귀는 어두워져 가고 허리, 다리,관절들은 삐걱댄다. 말은 어눌해지고 생각하는 속도조차 그에 맞춰 느려진다. 쉬이 잊어버리고 잃어버린다. 늙어간다는것, 부디 육체만의 일이기를 소원하지만 때로 정신의 늙어감을 깨닫고 소스라친다.
벌써 몇년 전의 일 하나, 지인 부부와 만나 얘기하던 중그 집 딸의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딸의 결혼식을 위해 춤까지 배웠다는 얘기며 아주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여가며 그 부부는 그 결혼식을 자랑스러워 하였고 나 또한같이 웃고 떠들며 부러워하였었다.
몇 달 뒤 그 댁으로부터파티 초대 전화를 받게되었는데 이런 저런 대화를 주고 받다가 “아참 그 따님은 언제 결혼하죠?” 라고 물었던 것이다. 잠시의 침묵이 저편에서부터 전화선을 타고 끔찍한 무게로 내게 전달되어 왔고 ‘이게 뭐지?’의아해하는 순간 춤까지 배웠다던 하이톤의 그 부인의 말소리가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최근의 일 하나, 평소 존경해마지않는 선생님께서 책 출판을 앞두고 표지 디자인이 나왔다시며 표지를 전해주셨다. 그표지엔 책 제목이 두개, 하나는오래전에 읽었던 것이요, 또 하나는 신문 지상에서 띄엄 띄엄읽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한달쯤 뒤, 책이 나왔다 하시며 내게 전해주시는 선생님께“ 책 주셨잖아요” “벌써 주셨는걸요”“그렇지만 또 주세요” 무려 세번이나 주지도 않은 책을 받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감동적인 문구와 싸인이 있는 첫장을여는 순간 이책은 받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천둥 번개처럼머리를 때리는 것이었다.
무관심, 그렇다! 건망증은 수시로 온다. 그런데 그 진원지는무관심인 것이다. 늙어갈수록나에 대한 집착이랄까, 내가 포함되지 않은 일은 쉬이 잊어버리고 귀담아 들으려하지도 않는다. 누군가와의 대화 중에 상대의 말에 귀 귀울이지 않고내 생각에 몰두해 있는 나 자신을 깨달았을 때의 그 황당함,같이 웃고 같이 우는 나눔을점차 잃어가는 것을 알아챌 때의 좌절감, 몸이 늙어감은 자연스런 것이라 여겨져도 정신의늙어감은 참을 수가 없다.
나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이내 정신을 점점 잠식해버려 퇴락시키고 황폐하게 만들어버린다면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몸의 뼈마디가 불거져 나오고 얼굴에 주름이 덮여도 거기엔 인생이 있고 때론 감동도 있다. 그러나 내 안의 늙음, 이를테면 뻔뻔스러움, 얼굴을 붉힐줄 모르고, 수줍음을 잃어버리고, 남의 말을 경청하지않고 자기 생각에 몰두해 있으며, 쉬이 체념하고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현명한 척 하고, 자신의 경험에 대한 지나친 확고함으로 더욱 견고한 아집의 성을쌓고, 무엇이든 안다고 생각하며, 편안함에 안주하고 대충을중도라 여기는 것처럼 시시때때로 그 얼굴을 드러내는 셀 수없이 많은 늙어감의 증거들은 다만 추할 뿐이다. 그리고 그 늙어감의 증거들 중 가장 두려운것은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보라빛 대지 위에서 나는오늘 무엇을 시작할 것인가. 무엇으로 불타오르는 노을을 준비할까.
<
어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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