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국민들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그 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말이다. 정치인이 아무리 고결한 이상과 국민들에 대한 무한 애정을 갖고 있다고 해도 말을 통해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그걸 이해할 길은 없다. 드러내지 않는 혼자만의 생각은 일기장 속의 개인적 언어와 다를 바 없다.
정치인들, 특히 국가지도자들에게 기자회견은 국민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가 된다. 다양한 매체를 만나 현안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면서 국민들의 이해를 구하고 언론들을 통해 제기되는 국민들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줄 수 있는 자리이다. 그래서 선진 민주국가 정치지도자들은 기자들 앞에 서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기자회견을 극력 기피하는 정치인들도 간혹 있다. 말 주변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기자들의 공격적 질문이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은 자신에게 부정적인 사안들이 많이 대두될수록 기자회견을 더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실증조사도 있다.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질문공세를 받아야 하는 데 따른 심리적 부담감을 고려하면 일견 자연스런 반응일 수 있다. 하지만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국민들 앞에 서야 할 때 당당히 설 수 있어야 한다.
최근 LA타임스는 힐러리 클린턴이 기자회견을 지나치게 기피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사설은 클린턴이 지난해 12월5일 이후 기자회견을 단 한 차례도 갖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공인으로서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고 꼬집었다. 클린턴을 공식 지지하고 있는 이 신문의 사설은 거친 비판이라기보다 애정 어린 고언에 가깝다.
사설은 “대통령이나 대통령 후보에게 정기적인 기자회견이 법적 의무는 아니지만, 많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대중에 대한 책임감을 보여주는 것이자, 현안을 잘 이해해야 할 동기를 부여해 준다”고 강조했다. 시험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얘기다.
이런 지적이 아니더라도 지도자를 자처하는 정치인이라면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도 거친 질문들에 맞서 자신의 생각을 밝힐 수 있을만한 결기와 당당함을 가져야 한다. 기자회견은 정치인들에게 부담이지만 동시에 기회이다. 그리고 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들은 보통 연간 10여 차례 이상 ‘각본 없는’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걸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다.
백악관 기자실 터줏대감으로 몇 년 전 사망한 헬렌 토마스는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에게 질문하고 추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대통령에게 일문일답할 수 없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기준을 적용한다면 대한한국을 과연 진정한 민주국가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통령이 이런 의무를 너무 방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3년 반 동안 가진 기자회견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것도 사전 조율의 냄새가 물씬 풍긴 회견들이었다.
왜 이처럼 기자회견을 극력 기피하는지 알 것 같기는 하다. 원고에 의존하지 않는 발언들의 두서없음을 볼 때(이건 어눌함과는 다르다) 생각이 잘 정리돼 있지 않다는 게 확연히 드러난다. 철학이 빈곤하면 말도 빈곤한 법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대통령의 기자회견 기피증은 너무 심하다. 사드, 우병우, 소녀상 등 국민들이 궁금해 하는 현안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청와대 회의석상에서 원고에 적힌 자기 말만 일방적으로 한다. 그걸로 끝이다.
대통령이 좀 더 자주 기자회견을 갖는 것을 보고 싶다. 물론 대전제는 사전 조율이 완전 배제된, 정말 순수한 기자회견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발연기’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진솔한 생각’을 듣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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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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