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크 오르바크(Frank Auerbach) ‘E.O.W.의 초상’ 1958년
한 장의 초상화<사진>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림을 보고 놀라는 일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각이라는 감각을 통해서 전 존재의 감각이 평상시에 느끼는 것을 뛰어넘은, 차원이 다른 감각의 확장된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뜻하는데, 초상화라는 것이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전 존재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 그림이었다.
화가가 그린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화가는 이 여인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한 인간의 삶 전체, 그가 기억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 피와 땀과 눈물이 응축된 그녀의 삶의 모든 시간들, 불안과 공포, 염원까지도 다.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캔버스의 표면과 사이즈, 색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 인간의 존재가 묻어날 듯한, 진지하다 못해 집요한 붓질로, 겉의 모든 가식이 벗겨져 마치 한 방울의 이슬처럼 축소되어 숨소리와 한숨이 들릴 듯하다. 그토록 연약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환영이 아닌, 손 안에 쥘 수 있을 듯 가까이, 그녀를 모르는 사람도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도록, 꿰뚫어 들여다 본 존재의 본질로, 영원한 원형으로 지각에 각인되도록,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존재를 온 힘을 다해 붙들어 놓은 듯하다.
추상 표현주의와 팝 아트. 미니멀리즘의 현대 회화이론에 의한 작업이 세상을 풍미하던 시대에 가까이서 바라본 사람과 풍경을 그리고자 했던 현대 영국 화가들의 강렬한 그림들이 게티 센터에 전시 중이다. 가히 현대 회화의 불한당들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한 이미지들을 적나라하게 펼쳐내는 프란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드, 프랑크 오르바크, 리온코쇼프, 키타이 등의 작가들이다.
현대 회화는 구상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회화 이론의 전개에 치중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 조차도 고루한 발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어떤 이론보다 직접 만난 사람들과 풍경을 그려야한다는 인간주의적 화가들로서, 이들에 의해 회화는 죽지 않았고, 또 다시 새로운 회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작가들이다.
절망과 비극의 내음이 극에 달해 혐오스러운데도 작품성이 드높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이 자명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구상회화를 전개해야 되는 어려운 숙제를 안고 그들은 그림을 그렸다. 온 몸으로 그린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이 그림들은 세잔이 이루어낸 회화의 정점을 이어가고, 추상화의 취약함을 뛰어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붓질을 하고 마치 진흙탕처럼 물감을 바르고 또 쳐 바르면서 새로운 감각의 회화를 탄생시키는데, 영성과 경건함이 사라진 현대 도시 문명 속에서 죽음을 대면한 삶의 잔혹함을 그린 캔버스 작업들이 무척 격렬하고 진지하다.
아름답기보다는 지독하고 잔혹한 감각의 그림들을 보고 전시관 문을 나서자마자 펼쳐지는 말리부의 멋진 바다 풍경과 햇살 가득한 LA의 대기를 느끼며 축축하고 어두운 런던이 아닌 빛 밝은 LA에 사는 게 무척 다행이다 싶다. 그리고 한 순간과 한 획이 시작이고 끝인, 물 흐르듯 관조하는 동양인의 시선으로 저 무한한 공간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가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는데, 고독한 투사와도 같은 화가들이 온 힘을 다해 창조한 그림들이 주는 강렬함과 확장된 의식으로 인해 하늘은 더 높고 나무들은 더 생기 있으며 햇살은 더욱 찬란히 느껴지며 오랜만에 다시 살맛이 나게 하는 멋진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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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숙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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