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현지시간) 별세한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평화공존의 모델을 제시해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던 오슬로 협정의 산증인이자 주역이었다.
페레스는 오슬로 협정으로 199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팔 지도자 3명 중 마지막 생존자였으나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슬로 협정의 역사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3년 9월 13일,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악관 정원에서 '팔레스타인 잠정자치에 관한 원칙선언' 즉 오슬로 협정에 조인했다.
협정에 조인한 아라파트와 라빈, 클린턴은 백악관 잔디밭에서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했고 이 장면은 중동 평화협상의 성공을 상징했다.
조인은 미국에서 이뤄졌지만, 사인이 이뤄지기 전 이-팔 양측의 비밀 협상 장소였던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를 따 '오슬로 협정'으로 주로 불린다.
당시 페레스 외무장관은 이스라엘과 오슬로를 오가며 8개월간 비밀 협상을 주도했다.
이-팔 간 첫 공식 합의 결과물인 이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PLO 양측은 상호 인정하기로 했고 요르단 강 서안 지역에는 준자치기구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들어섰다.
이스라엘엔 안보 확립을, 팔레스타인에는 존엄과 자치실현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은 물론 예루살렘, 서안, 가자지구에서는 양측의 유혈 충돌과 자살 폭탄·흉기 공격 사건이 지속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서안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촌은 계속 확장됐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과 정착촌 문제, 난민 귀환 권리를 이유로 저항에 나서면 이스라엘은 안보를 내세워 즉각적으로 군사보복을 가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의 또 다른 분노를 촉발하면서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팔 간 외교적 싸움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사이 협정 조인 당사자인 라빈 총리는 1995년 극우 청년의 총에 쓰러졌고, 아라파트도 2004년 사망했다.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설명하고 양측의 지위를 인정하도록 이끈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 협정이 좌초 위기에 있거나 유명무실화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AFP통신은 이 협정이 맺어진 지 20년이 넘었어도 그 협정의 목표가 현실화될 것으로 낙관하는 시각은 많지 않다고 분석했다.
지난달 발표된 한 설문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인의 약 51%가 평화협상에 기반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2국가 해법'을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 중에서는 53%가 이 해법을 지지했다.
페레스는 올해 초 연설에서 여전히 평화를 믿는다고 밝혔지만 "양측이 (이-팔 평화공존의) 장애물들을 다르게 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팔레스타인 시각의 최대 장애물은 유대인 정착촌이고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테러'라는 것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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