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직업으로 하는 탓인지 나는 어휘 선택에 민감한 편이다. 특히 지난 20여년 동안 이 일을 해 오면서 시대에 따라 어휘도 변해 감을 피부로 느낀다. 내가 일하는 직장은 미국(정확히는 일리노이, 에반스턴)에 본부를 둔 국제적 자선단체인데, 내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수혜자(beneficiaries)’니 ‘저소득 국가(Low-income countries)’니 하는 단어들을 많이 썼다. 하지만 요즘은 수혜자라는 말 대신 ‘지역사회 주민’, 저소득국가 대신 ‘개발도상국’으로 쓴다. 그리고 ‘지역사회 주민들을 위한 프로젝트’가 아닌, ‘지역사회 주민들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임을 강조하며 파트너십에 역점을 둔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만 해도 ‘블루 칼러’니 ‘화이트 칼러’니 하는 단어들을 사용했지만 차별적인 어감을 준다고 하여 이제는 블루 칼러 대신 ‘워킹 클래스’라는 말을 쓴다. 한 때 ‘핑크 칼러’ 직업군의 대표주자 격이었던 비서도 ‘secretary’보다는 ‘executive assistant’로 부르는 추세이다.
혹자는 그 대상이 가진 본질이나 속성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부르는 명칭만 바뀐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물이나 사건을 부르는 명칭, 혹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에는 그 사회가 그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 가치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효과와 파급력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때문에 오용과 왜곡의 소지도 다분하다. 같은 현상을 두고 어떤 명칭으로 어떻게 부르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야단스럽게 발효된 ‘김영란법’이란 명칭은 영 듣기에 거북하다. 이 법의 정식 명칭은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이다. 명칭이 너무 길어 불편하다면 ‘금품수수 금지법’ 혹은 ‘청탁금지법’ 정도로 줄여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김영란법이라는 명칭과 금품수수 금지법이 주는 어감의 차이를 생각해 보라. ‘조선’을 ‘이조(이씨 조선)’로 부르게 했던 일제 식민사관을 떠올린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노동자의 권리가 크게 축소된 법안을 ‘노동개혁 법안’이라 부르고, 직원들의 임의 해고를 더욱 수월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성과 연봉제’라 부르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편치가 않다.
한 발 더 나아가, 김영란법으로 외식업계가 위기에 처했다거나 내수가 침체될 것이라던 뉴스를 접하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내수 경제가 접대와 뇌물 관행에 의존해 왔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리고 마치 내수 경기의 침체를 김영란이라는 한 별난 인물의 탓으로 돌리는 듯한 인상까지 주고 있지 않은가.
김영란법은 금품수수 금지법 혹은 청탁금지법으로 불려야 맞다. 이 법의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공무원, 공기업 직원/국공립학교 교사, 사립학교 교사, 기자, 다시 말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종사하는 사람들은 청탁이나 접대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정말 간단하다. 청탁의 대가로 뇌물이나 접대를 받지 않고, 5천원이든 10만원이든 자기 밥값은 자기가 내면 되는 것이다. 이같은 규정이 그토록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들어 놓을 일인가.
이제 한국사회도 달라져야 한다. 수십년 내려온 관행과 한국인 특유의 ‘정’이라는 정서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혼란과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겠지만, 이것은 한국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장애물이다.
나는 금품수수 금지법이 고 김영삼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단행했던 금융실명제에 버금가는 효과를 발휘해 주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우리가 김영란법의 본래 명칭을 되찾아 그것이 말하는 이나 듣는 이들 모두에게 청렴한 공직사회를 위한 당연한 책무를 상기시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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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국제 로타리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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