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사람의 이목을 피하여 은밀히 밤에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랫동안 맘에서 맴돌며, 내 묵상의 요점이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는 내 마음의 실랑이를 씻어주는 단비와도 같았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과 느릿한 화면전개로 다소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아름다운 영상에 마음을 열고 몰입하다 보면, 어느 덧 이란의 거장 키아로스타미의 관조적 세계에 동화하게 된다.
주인공 베흐저드는 방송국 PD라는 신분을 속이고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작은 촌락에 잠입한다. 그는 쿠르드족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장례 의식을 촬영하기 위해 한 노파의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곧 임종할 것이라던 노파의 더딘 작별로 속이 탄다. 조그만 마을에서 늘 길을 헤매며 혼동을 반복하는 내적 갈등 속에 역설적으로 베흐저드는 서서히 마을의 순박한 자연과 진정한 인간성에 눈을 뜨며, 근시안적인 시선 속에서 보지 못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마침내 노파는 숨을 거두지만 베흐저드는 촬영을 포기하고 미소를 지으며 마을을 떠난다.
백 살의 노파에게는 고별의 시간이 있고, 말똥구리와 거북이에겐 말똥구리와 거북이의 시간이 있다. 그것은 베흐저드가 갇힌 ‘자기’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그들안에 살아 있는 시간이고, 볼 수 없음으로 죽어 있던 그의 시간이다. 모든 것에는 섭리로 흐르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진정으로 볼 수 있을 때, 베흐저드는 삶의 신비한 연결고리를 깨닫는다. 삶은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고, 이 연결은 끝이 없다는 것을, 그것은 곧 삶을 통한 죽음이자 죽음을 통한 새로운 삶으로의 연결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13주의 마지막 여정지에서 의심을 버리고 섭리를 통해 순풍처럼 제자리로 돌아간 니코데모를 다시 만난다. 그것은 헛된 헤매임속의 집착을 버린 베흐저드의 미소이기도 하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그분의 무한하신 계획 속에 섭리로 불어오는 바람이다. 번민과 의심을 버리고 피안으로 부는 순풍의 힘을 믿을 때, 바람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리라.
그동안 보잘 것 없는 글에 큰 격려와, 장을 마련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행복을 기원한다.
<
신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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