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마무리도 삶의 장이다. 나도 모르게 흘러버린 시간, 가을이 손에 잡힐 듯하여 혼자 걸어보고 싶어졌다. 한철의 끝자락이 그리도 풍성하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가을은 여름이 가져온 선물이다. 여름 색은 그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양함이 없이 ‘초록’ 뿐이었다. 그것은 푸른 열망이었고 젊음이었고 자신감 이었다. 그러나 가을은 여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어떤 경우든 확실한 정체를 보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거리가 필요하다. 멀리 보아야 참 모습이 보인다. 그처럼 강렬하게 살면서 저토록 확실하게 붉어지려고 얼마나 별렀을까? 집채만 한 나무가 붉게 타면서 걸음을 멈추게 하는 가을이 거기 있었다.
질투 없는 사랑도 시샘 없는 우정도 혐오감 없는 매혹도 없다한다. 가을의 빛깔들은 분명히 서로 시샘하고 있었다. 어떤 색이라고 지적할 수 없는 것들이 엉켜서 이루어진 조화, 각기 자기를 고집하고 있으면서도 어느 지점에서 돌연한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치열한 진정성이었다.
이 매혹적인 빛깔도 얼마 후에는 혐오스러운 죽음의 빛으로 변할 것인가. 햇볕만 찌르릉 찌르릉 울리던 시절의 녹색이 숙성한 후에 내놓은 모범 상패 같이 알찬 가을을 보고 거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음은 힘이 있고 용기가 있어도 노인이 살아온 깊은 연륜을 넘어 설 수는 없다. 노인은 젊음을 경험했으나 청년은 노인을 경험하지 못했다. 치유받기를 바라지 않는 가을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내심을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에머슨은 자연의 법칙은 곧 마음의 법칙이라 했고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이라 했다. 계산과 직결하는 생활이라는 단어들을 통째 잊을 수 있는 시간, 나는 중력을 잃어버린 존재로 가을 단풍 위를 날고 있었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 가득한 침묵, 그 침묵 속에 있는 것이 꼭 가을인 것만 같았다. 무언가 생각날듯한데 안 잡히는 것도 가을인 것 같았고 나 혼자만의 것이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가을 때문이라고 고집하고 싶었다.
사르르 부는 바람에 지금껏 지키던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떨어지는 낙엽은 자기들 갈 길을 모르고 바람이 가자는 대로 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불평이 없어 보였다. 때로는 파리 떼처럼 차의 앞 유리에 달려들다가, 때로는 유유히 나비처럼 춤을 추고, 혹은 작은 새떼처럼 날기도 했다. 도르르 말려서 오종종 어느 한곳으로 몰려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상의하듯 머물러 있기도 했다.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다가 그리운 공간 만나면 그 자리에서 한 움큼 재가 되어 흙에게 보시하자는 것일까? 본원으로 돌아가는 만물의 원리에 그들은 순응하고 있는 것이다.
속도는 있으되 방향을 모르고 구르는 낙엽처럼 인간도 실은 방향을 모르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세상을 읽을 줄 모르는 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일 것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믿을 사람도 없는 것 같은 세상 말이다. 그러나 꼭 불신이나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한 친구의 배신을 받아 좌절할 때는 위로해준 또 다른 친구가 반드시 옆에 있다. 잘못을 범했던 친구는 어느 날 깨닫고 은근하게 사과한다. 산다는 것은 늘 순환하는 계절처럼 흐르고 그 변화에 유쾌하게 편승하면서 가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낙원이란 거기에서 쫓겨난 후에야 알게 된다. 봄여름 가을도 보내고 나서야 그 의미가 돈독해진다. 질서에서 벗어난 자유는 불안하다. 자연의 이치를 따라야만 한다. 참다운 인식은 경험이 종결되면서 지어진다. 잃어버린 뒤에야 아프게 깨닫는 사랑처럼.
매년 새로운 절기를 만남이 즐겁고 감사하다. 그 어느 계절에나 생의 들뜸이 있었고 마음의 현을 건드리는 영혼의 숨결이 느껴지곤 한다. “자~이제 그만 가을이 지닌 철학적 함유에서 벗어나자.” 이 가을을 깊숙이 사무치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매일을 아끼면서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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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숙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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