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지난 1995년 삼성 이건희 회장은 “한국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발언을 했다가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정치보다는 그래도 기업 수준이 좀 더 높지 않은가 라는 자신의 속생각을 드러낸 발언이었다. 하지만 요즘 국정농단 게이트와 관련해 드러나고 있는 기업들의 어둡고 추악한 민낯을 보면 과연 이들에게 2류라는 평가를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수십 년간 지속돼 온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채 구악을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불법적인 거래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고 기득권을 지키는 행태는 4류인 정치 수준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 없다. 최근 세계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브랜드들이 한결같이 고전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업들 내부의 전 근대적인 문화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국격’이니 ‘글로벌 코리아’니 하는 구호들이 난무했지만 이들 아래서 정작 국격은 떨어지고 글로벌 코리아의 위상 역시 크게 추락했다.
이처럼 정치와 기업이 엉망이라고 해서 한국의 국격과 글로벌 코리아의 위상이 마냥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것만은 아니다. 다행히 국민들이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파괴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통해 확인된 대한민국 국민들의 수준에 해외언론들은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100만이 훨씬 넘는 군중들이 모였음에도 별다른 충돌이나 부상자, 연행자 없이 시위가 평화적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대해 놀랍다는 반응들이다.
국민들은 지난 대선에서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줄 아는 ‘자기 성찰’과 ‘자기 교정’이다. 국민들은 현재 이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수한 실정과 잘못을 하고서도 반성하거나 스스로 고칠 줄 모르는 정치판, 그리고 기업들과는 수준이 다르다.
국민들의 높은 의식과 질서 있는 행동을 추동하고 있는 힘은 ‘분노’이다. 분노는 분풀이와 다르다. 국민들이 분풀이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면 분명 폭력시위로 돌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분풀이가 아닌, 분노하기를 택했다. 일생동안 저술과 강연을 통해 분노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레지스탕스 출신 스테판 에셀은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나름의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들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합류하기 위해 국민들은 거리로 나선 것이다.
최악의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버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결국은 국민들 앞에 굴복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일 뿐 아니라 사회과학적 자료 또한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3년 전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는 2000년에서 2005년 사이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반정부 시위들을 분석한 후 “전 인구의 3.5% 이상이 참여하는 평화적 시위는 성공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체노웨스 분석에 따르면 평화혁명은 50%를 훨씬 넘는 성공률을 보인 반면 폭력혁명 성공률은 20%에 불과했다. 국민들의 4% 정도가 참여한 한국의 평화혁명은 딱 여기에 들어맞는다.
탄생하지 말았어야 할 권력의 퇴진을 요구하며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분노는 ‘지혜로운 분노’이다. 폭력적인 권력에 빌미를 주지 않으면서 정의실현의 에너지인 집단분노를 분출할 수 있는 것은 성숙한 시민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통령은 5류, 정치는 4류, 기업은 3류임에도 대한민국이 그런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런 국민들의 힘 때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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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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