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회색의 하늘과 땅, 비가 쏟아지는 네바다는 흠뻑 젖어있다. 그 대지를 가로질러 금빛 벌판과 푸른 하늘이 맞닿아 끝없이 이어지는 아이다호로 들어선다. 억수같은 비가 온 뒤 하늘은 높고 청쾌한 공기가 가슴을 채운다. 너른 벌판은 군데군데 초록 천을 덧대어 기운 황금빛 이불을 덮고 있다. 인적없는 들판 한 가운데를 달린다. 간간이 집 몇채 허름한 어깨를 서로 기대고 있는 마을들을 지나치건만 사람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마을이다 싶으면 어김없이 펼쳐지는 밭들은 갈아 엎어져 다크 쵸콜렛 속 살들을 드러내고 있다.
가끔은 이 계절에도 초록 새싹이 가득한 밭을 지나며 무슨 작물일지를궁금해 한다. 이미 수확이 끝난 옥수수대들이 패잔병의 군대처럼 퀭한 몰골로 서걱서걱 바람에 쓸리고 있다. 아이다호에서 첫번째로 만나는 큰 도시 Twin Falls에 다가갈수록 노랑물을 함박 머금은 나무들이 푸르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들거린다. Twin Falls에서 아이다호의 커피 맛을 찾는다. 손쉽게 눈에 띄는 스타벅스는 놓아두고 물어물어 이 곳 커피 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기대 이상으로 쌉싸름한 맛에 어우러진 그 향기가 그만이다.
도시를 빠져나가며 막 다리 하나를 통과하는데 무심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곤 황급히 갓길에 차를 세운다. 닮지는 않았더라도 스페인의 론다를 연상시키는 벼랑이 저 아래 길고 긴 짙 초록 강의 굽이를 따라 양 쪽으로 마주보며 멀리멀리 돌아 나간다. 어디로부터인지 모를 물줄기들이 마치 시내 도심 한 복판에서부터 떨어지듯 여기저기 폭포가 되어 하얗게 벼랑을 타고 흘러 내린다.
벼랑과 벼랑을 잇는 방금 건넌 다리 아래 저만치엔 골프장이 절묘한 그린을 만들며 펼쳐지고 그 곳을 끼고 도는 깊은 강 수면 위엔 보트 하나 느릿느릿 물살을 타고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이름답다. 철골조 교각의 빠른 선으로 날렵하게 흐르는 아취, 골프장의 우아한 초록 곡면들, 강물의 유연한 굽이침,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벼랑의 수직선들, 그리고 표면의 수많은 켜들과 그 거칠고 성긴 면들, 탄성이 절로 난다. 알려지지 않은 비경을 찾아내기라도 한 듯 한껏 신이 난다.
도심지를 벗어나자 다시 너른 벌판, 머리 위엔 낮게 잿빛 짙은 구름이 내려와 손에 잡힐듯한데 먼 하늘은 더할수 없이 파랗고 하얀 뭉게구름을 수없이 뿜어낸다. 새하얀 설산의 봉우리들이 지평선을 내내 따라가며 우리를 오라 손짓한다.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한다. 한 시간 여쯤 달렸을까, 갑자기 지평선이 새까맣게 변하는가싶더니 화산암으로 천지가 온통 뒤덮여 있다. Craters of the Moon, 침묵의 무채색 대지, 석탄덩이들을 마구 던져놓은 듯하다.
이리도 광대한 지역을 뒤덮었을 화산폭발은 과연 어떤 것일까. 화산 폭발로 생겨난 불구덩이 끝 깊이를 알수 없는 어둠을 공포에 질려 내려다보기도 하고 용암이 지표를 놓아두고 흐르다가 식어버려 어마어마한 동공을 이루어낸 동굴들이 지표면 아래에서 서로 연결되어 여기 저기에 거대한 어둠의 입을 벌리고 있다. 여긴 지구가 아닌 어느 달의 땅, 그 한가운데를 검은 타르로 덧칠한 길을 따라 걷는다. 수천년 전 불었을 처연한 바람이 내 얼굴을 때리고 머리칼을 갈가리 찢어댄다. 매캐한 냄새가 나는듯하다. 느닷없이 나오는 헛 웃음… 하하… 눈물이 난다. 내 생은 이제 길어야 이십년 안팎, 이 무어란말인가, 인간의 생은… .
저 멀리 설산이 냉엄한 얼굴로 날 내려다본다. 산은 거기 있고 용암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바람이 불고 나는 그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여기 서있다. 저 바람은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리라, 한날 한시에 우리가 여기 이렇게 같이 있었다는걸… . 그리하여 비록 찰나의 시간을 살고 간다하여도 나의 존재가 그리 가볍지 않았음을 오래도록 증명하여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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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자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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